올해도 어김없이 영화 연말결산합니다.
다른 해보다 유난히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_-;;; 항상 150편 이상을 매년 보는데 올해는 120편 정도에 그쳤고
그나마 복잡한 심경으로 인해 킬링타임용 영화를 더 많이 본 한 해 같네요.
그래서 50편을 꼽기도 불가능하고, 30편만 골라 봤습니다.
아래 사항은 참조해주세요.
* 아래 영화 이미지는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을 제외하곤 모두 직접 스크린 캡쳐한 컷입니다.
* 아래 30편의 영화 중 1/3 이상은 영화관에서 봤습니다. 국내에 전혀 개봉되거나 2차판권조차 없었던 영화는
어둠의 경로로 봤습니다. 덕분에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린 CGV VIP 멤버입니다.-_-;;;
* 2010년에 개봉된 영화만을 기준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에 개봉했어도 2010년에 본 영화도 포함했습니다.
덕분에 [a Single Man]같은 영화들이 올라와 있으니 이점 참조해주세요.
* 영화에 대한 간략한 리뷰는 철저히 제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제 자신이 감히 영화에 순위를 정한다는 것,
불편할 수 있으나 스스로 정리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올려 봅니다. 이해해주시길
30. [Mr. Nobody/미스터 노바디] (2009)
directed by Jaco Van Dormael
슈레딩거의 고양이를 바라보는 심각한 물리학자들의 표정을 관객들로 대체하고,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를 슈레딩거의 고양이처럼 스크린에 투영시켜버린 영화.
대놓고 평행우주의 세상을 끌어오며, 지금 우리가 육체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현실은 실재가 아닐 수 있다는,
그러니까 일종의 피론주의등을 빌어 입을 풀어도 복잡한 심경을 지울 수 없는 영화.
하지만 난데없이 120살이 넘은 채 동면에서 깨어난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평행우주의 삶을
그대로 스스로 이해했을 때 그 자신이 아무도 아닌, Mr. Nobody라는 사실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를 보면 갑자기 궁금해진다. 정말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대로 인생을 살고 있는걸까?
종교적인 차원의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우린 부모로부터 생물학적 유전인자를 물려받고 선택을 가늠할 인성의 상당부분을
이미 결정지은 채 태어났는데 우린 정말 자유의지로 우리의 선택을 판단하고 있을까?
결국엔 불가지론에 다다르는 몹쓸, 미천한 지식이지만 이 영화는 그 어떤 선택의 순간이었더라도 후회없고,
치열하고 아름답게 살겠노라...또는 살았노라라는 역설적인 인생 찬가로 보인다.
29. [an Education/에듀케이션] (2009)
directed by Lone Scherfig
이런 부류의 영화는 남녀가 만나는 장면만 봐도 대강 그들의 결말이 그려진다.
재밌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런 첫사랑의 열병같은(?) 혹은 어찌보면 위험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자신의 여러 기억들(남에게 들었던 타인의 이야기 또는 자신의 경험)을 조합하고 이입시키며 충실히 본다.
이건 제니(캐리 멀리건)의 성장 영화일 수 있지만 역으로 결코 타협하기 힘든 현실과 순수한 이성과의 충돌에 대한
다소 씁쓸한 풍자이기도 하다.
우린 영화를 보면서 파국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지만 감정이 휩쓸고 간 공허한 자리에 남아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제니에겐 '교육'이란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잔혹한 어른의 감정만 남는다.
캐리 멀리건과 이완 맥그리거의 호흡이 훌륭했던 영화.
28. [Shutter Island/셔터 아일랜드] (2010)
directed by Martin Scorsese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오히려 이렇게 내재된 고통과 거부하고 싶은 아픔을 외향적으로 터뜨리는 연기가 훨씬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표출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야하는 [무간도]의 양조위역을 [Departed]에서 할 때의 어색함은 확실히 이 영화에선 없었다.
게다가 그 주위에서 보여주는 조연들의 연기 역시 정말 훌륭하고.
이런 영화를 볼 때 감독의 연출 능력이 배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물론... 그닥 만족스럽지 못했던
디카프리오의 연기를 봤던 [Departed]도 마틴 스콜시즈의 영화지만.)
고립된 섬과도 같은 이 영화의 배경은 제목과 딱 맞게도 고통으로부터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이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영화엔 반전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영화의 반전에 집중하면
정작 무얼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를 망각할 경우가 너무 많으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테디라는 인물이 그려낸 사실상 거대한 정신병동이 셔터 아일랜드 그 자체가 아닐까.
아무튼 고전적인 영화적 방법론을 현대적으로 풀어 내는 마틴 스콜시즈의 놀라운 능력에 그저 박수를 보낼 뿐이다.
27. [Despicable Me/슈퍼배드] (2010)
directed by Pierre Coffin, Chris Renaud
간혹 시놉시스를 깡그리 무시할 만큼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이 존재하기도 한다.
딱... 이 영화 [Despicable Me/슈퍼배드]가 그렇다고 봐야하지 않나?
처음 영화가 시작할 때 러시아 발음 잔뜩 섞인 악당 캐릭터 '그루'의 존재감은 요즘 하는 말로 그야말로 '미친 존재감' 그 자체였다.
일렬주차를 할 때도 앞뒤 차야 어찌됐건 밀어부쳐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고, 단순히 아이들을 겁주는게 아니라 궁금증이나 기대를 갖게 한 뒤
가차없이 이를 배반하며 주는 괴롭힘을 행하고는 낄낄 웃는 그루의 캐릭터는 어지간한 애니매이션에선 보기 힘든 존재감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아이들 셋 입양하면서 순식간에 순한 양이 되고, 가족의 정을 이해하게 된다는 설정은
분명... 쉽게 납득할 수 없지만, 그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이건 분명히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는 점.
이건 팝콘 사들고 콜라들고 아동용 쿠션을 깔고 앉아 볼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납득한다면,
영화적 재미가 남게 된다. 그리고 그 영화적 재미라는 건 생각보다 매우 강렬한 편이고.
26. [the Town/더 타운] (2010)
directed by Ben Affleck
벤 에플렉의 야심작.
그가 감독으로서 충분한 재능 이상을 갖고 있음을 만방에 알린 영화.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를 연상케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이래저래 비교는 되겠지만 캐릭터의 입체감이 부족한 점을 제외하면 그닥 눌릴 영화도 아니다.
다만, 얘기했듯 우리가 흔히 봐왔을 법한 캐릭터는 익숙하지만 몰입도는 떨어진다.
(뭐 그렇다고 되도않는 캐릭터 만든다고 오버하는 여러 영화같은 우는 범하지 않지만)
보스톤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이기에 찰스타운, 펜웨이 파크, BPD등 보스톤의 디테일을 잘 살려냈고, 방향성이 확실한 시가전과
긴박감의 리듬을 놓치지 않는 편집과 카메라 워크등 앞으로의 작품 행보에 기대를 가질만한 연출자로서의 역량을 확실히 보여준다.
솔직히 말해 어둠의 경로를 통해 봤으나 1월 개봉시 다시 한번 극장에서 볼 예정이다.
(어둠의 경로로 보실 분들 영어 자신없으면 그냥 참으시라. 이 영화 자막은 재앙수준이다)
25. [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 Part 1/해리포터 죽음의 성물 1] (2010)
directed by David Yates
David Yates 감독이 본격적으로 해리 포터 시리즈의 지휘봉을 잡게 된 이후부터 내게 해리 포터의 극장판은
그닥 큰 매력은 없는,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의 킬링타임 프렌차이즈 영화처럼 인식되었다.
늘 영화관에서 민성군과 보지만 이런 생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마음 속엔 늘 3편이 가장 훌륭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민성군이 [죽음의 성물 part 1]을 보기 전에 복습한다며 해리포터 1편부터 6편까지를 다 볼 때
나와 aipharos님도 함께 4편부터 봤는데 오히려... 극장에서 볼 때보다 집에서 다시 보는게 더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기나긴 시리즈가 이제 내년 여름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책이야 진작에 마무리되었고,
영화에 출연하는 주인공들은 이젠 훌쩍 청년이 되어버렸지만 이들은 여전히 아이들의 행동으로 성장통을 겪는다.
그리고 세상이 다 무너져버린 듯한 [죽음의 성물 part 1]에서 우린 지금의 한국을 바라보게 된다.
롤링 여사가 몇년 후의 한국을 예상하고 글을 썼을 리도 없고,
이건 다분히 파시즘이 되살아난 현대판 망령에 대한 비유일 수 있지만, 볼드모트의 사악함으로 장악한 마법의 나라는 딱... 지금의 한국 꼬락서니를 하고 있다.
영화는 현실보다는 나은 편이다. 거기엔 엑스펠리아무스같은 마법을 쏘며,
혁혁한 실력을 자랑하는 마법사들이 거대한 악의 권력에 대항해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싸움이라도 하니 말이다.
이야기가 세어버렸지만... 이렇게 처절하리만치 절망적인 세상을 그려낸 이번 해리포터 시리즈에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앞으로 다가올 마지막 시리즈가 더더욱 기대가 된다.
24. [Flipped/플립] (2010)
directed by Rob Reiner
사랑을 하면 콩깍지가 씌운다고들 한다.
상대방의 모든 단점까지 자신이 평생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사랑할 것 같은
그런 다소 맹목적인 콩깍지. 사람들은 이걸 '사랑의 마법'에 취했다고들 한다.
로브 라이너가 이 아름답고 빛나는 청춘영화의 배경을 60년대로 취한 것은 원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빈부 격차가 적었고, 노동의 땀만큼 적절히 보상받았던 유일한 시기가 60년대였고
그 풍성한 시간에서 아날로그적인 교류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던 시기가 또한 그때이기도 했다.
줄리가 속깊고 영롱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사실은 또래의 아이들과 그닥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순간 상대방인 브라이스는 깊은 마음과 다른 눈을 가진 줄리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안그래도 성장 영화를 좋아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따스한 시선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요즘 세상엔 줄리같은 아이가 없을거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해지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인정하고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며
그걸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랑의 첫 단계라는 걸 이 영화는 너무나 애틋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럼에도 결코 감정의 세세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말이다.
민성이와 함께 정말 즐겁게 본 영화다.
(사실 이 영화는 엉터리 환상만 잔뜩 불어넣는 [High School Musicical]을 민성군이 본 이후 눈 정화, 마음 정화 차원에서 함께 본 영화였다)
23. [Please Give/플리즈 기브] (2010)
directed by Nicole Holofcener
미국의 중산층을 다루는 미국 영화씬의 시선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Ordinary People/보통사람들] 이후에 그닥 달라진 바는 없다.
다만 보다 신랄하게 솔직해지고 교감이 위선적으로나마 지탱되던 모습마저 거세했다는 것 정도가 달라진 거라 보겠지만.
[Please Give/플리즈 기브]는 단순히 미국 중산층 가정의 위태로운 이야기만은 아니다.
솔직히 이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는 지나칠 정도로 평온해서 알렉스의 위태로운 감정이 전혀... 위기라는 생각도 들지 않으니까.
온전한 사랑(가족애나 이성애, 또는 박애주의)을 얘기할 수 없는 가면의 감정들이 가득한 일상에서 아주 우연한 자성의 계기로 인해 감상적인 박애주의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는 주인공 케이트와 난데없이 그닥 진지하지도 않게 욕망에 따라 유혹을 좇는 남편 알렉스,
평범하지만 따뜻한 사랑을 따라나서는 옆집 처녀 레베카등의 평범한 이야기다.
중산층의 위선이 분명한 한계를 갖게 되는 얄팍한 자성으로 변화하고 그 순간에 머무르는 이 영화는 보는 이에 따라
분명히 평가가 확연히 갈리겠지만 오히려 더 깊은 자성으로 오버하는 비현실적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내겐 더 공감이 가고 인상도 깊게 남더라는...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결국엔 관계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이들이 자신의 문제를 되뇌고 자신을 반성하는 모든 동기는 역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22. [Easy A/이지 A] (2010)
directed by Will Gluck
거짓말이 불러온 소문. 그리고 거침없이 자신들의 자극을 위해 확대재생산되는 소문이 한 사람의 모든 인성 자체를 결정지어버리는 이 코미디는
어느 미국의 한 고등학교 얘기만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다행히도 이 영화의 주인공 올리브(엠마 스톤)는 이런 와중에도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함이 있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이해심 극강의 부모가 주위에 있으며, 게다가 그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자신을 좋아해주는 킹카까지 있으니 뭐... 이런 소문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을 것 같다.
게다가 이 모든 소문이 SN 한방에 정리되지 않나. 누구나 알 듯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니 이 영화의 설정은 따지고보면 이 모든게 다 현실 불가능한 이야기다. 성장의 고통을 이토록 바보같을 정도의
낙관스러움으로 일관한 영화는 현실을 왜곡하는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재밌고 인상적이다. 스스로 주홍글씨 표식을 가슴에 붙이고 그 상황을 즐기는 그녀의 도도함과
당당함이 오히려 이 시대엔 더 필요하기도 하고, 이런 풋풋한 감정들이 영화 속에만 있지 않을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도 갖게 된다.
영화 속에선 모두가 희화화되었지만 실상 이러한 대립적인 존재들이 실생활에서 갈등할 때 얼마나 심각할까하는 생각을 잠시나마 접게 해준,
그러니까 이 영화는 바램의 영화에 지나지 않는 환타지지만 그 자체로 꿈꿔볼 만한 학창생활의
기억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내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참... 황당한 얘기지.
*
이 영화에서의 엠마 스톤은 너무나... 예쁘더라.-_-;;; 완전 반했음.
21. [Scott Pilgrim vs. the World/스콧 필그림] (2010)
directed by Edgar Wright
감독이 에드가 라이트라는 점부터 기대 만빵이었던 영화.
그의 전작들이 모두 가장 인상적인 영화였다는 점에서 기대할 수 밖에 없었던 영화다.
원래 만화가 원작이고 그 인기로 게임까지 나온 상황이라 영화는 철저하게 만화와 게임의 룰을 따른다.
어찌보면 단순히 여친의 전남친과 아케이드 게임룰을 따라 싸우는 연애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선 어떤 하이틴 로맨스물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자기존중에 대한 이야기를 괴팍한 설득력으로 던져준다.
자신에 대한 성찰은 온데간데없이 타인과의 얄팍한 관계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려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는
요즘 사랑의 감정에 앞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존중이 먼저라는 철학만큼은 확고한 영화.
그러면서도 사춘기의 복잡한 연애감정은 그대로 드러내 이걸 그래픽으로 바르는 에드가 라이트의 능력에는 박수를 보낼 뿐이다.
그런데... 다음엔 꼭 다시 [Shaun of the Dead/새벽의 황당한 저주]나 [Hot Fuzz/뜨거운 녀석들]같은 영화로 다시 돌아와주삼.
20. [空氣人形/Air Doll/공기인형] (2009)
directed by 是枝裕和(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DVD박스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영화를 본 건 오직 [하나(花よりもなほ)]
뿐이었다. 그의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못보고 있는 이유는 예전에 언급한 바 있는 한심한 이유이니 생략하고.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배두나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을 수도 없고, 빼놓고는 말이 되지도 않는다.
그녀가 주연을 맡으면서 단순한 판타지가 생명을 얻고 현실을 획득했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도 그녀의 실제 모습과는 상관없이 4차원 캐릭터라는 인식이 필름 속 공기인형의 캐릭터에 그대로 녹아들어
그녀가 연기하는 공간 자체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능력이 그녀에겐 있다.
은근히 에로틱한 장면들이 사실상 넘쳐나는 건 그녀가 섹스토이라는 설정때문인데 덕분에 에이타와의 섹스나
다른 이와의 섹스가 형언하기 힘든 묘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면서 백지와도 같은 공기인형의 캐릭터에 몰입되는 경험을 하게 한다.
딱히 꼬집어서 '바로 이 영화다'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역대 필모 중
가장 평범한 영화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마치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의 퓨어 소프트 버전같은 결말은
현실에서의 순수한 판타지의 종식같은 생각이 들어서 무척 여운이 깊었다.
19. [a Single Man/싱글맨] (2009)
directed by Tom Ford
감독이 톰 포드다.
어쩌면 지금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의 얼굴에 씌여있을 안경의 디자이너일 수도 있는, 구찌의 디자이너였던. 감독 데뷔작이라고 보기엔
놀랍도록 인상적인 영화임에 분명하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너무나 스타일이 넘치는 지라 연인을 잃고 목숨까지 끊으려는 조지(콜린 퍼스)의 괴로운 심경이
그 넘쳐나는 스타일과 배경음악등에 묻혀버린 느낌마저 든다.
육체가 에로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마치 뭔가 대단한 DP용 매개체같은 느낌으로 그려지는 초반부도 보는 이가 뻘줌해지는 이유기기도 하고.
그런데도 이 영화를 거부하기는 쉽지가 않다. 넘쳐나는 럭셔리한 스타일링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흐르는
조지의 감정과 심경의 변화는 매우 세밀하게 표현되고 있고, 동성애도 이성애와 다를 바 없는
사랑의 종류라는 사실을 일반의 거부감을 넘어서 충실하게 묘사한다.
문학적인(어셔우드의 원작) 전달을 애당초 생각하지 않았던게 아닐까 싶지만 이 넘쳐나는 패셔너블한 스타일 속에서도
거부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느낌. 이 모든 걸 다 감안해도 콜린 퍼스의 연기는 정말... 매혹적이다.
18. [the Ghost Writer/고스트 라이터] (2010)
directed by Roman Polanski
남의 인생을 가공하는 대필 작가가 전임의 죽음으로 전 영국 수상의 자서전을 맡게 되나 그 배후의 음모를 알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다. 개인이 권력의 자장 안에 발을 들여놨을 때 그 생리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다가오는 신상의 위협에 대한 이야기.
익숙한 이야기지만 폴란스키는 그답게 격조를 지키며 군더더기없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등장하는 전 영국수상 아담 랭은 누가봐도 블레어를 지칭하는 듯하고, 그가 사실은 미국의 CIA였다는 식의 음모론은
어찌보면 가당치않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역으로 말하면 블레어는 CIA의 개같은 놈이었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의 아담 랭은 그야말로 무기력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지만, 더 큰 배후는 다른 데 있다는 것도
블레어 따위가 하야해봐야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런 영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냉소가 이 영화엔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폴란스키의 건조한 연출에 힘입어 더욱 빛을 발하고 있고.
17. [Fantastic Mr. Fox/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2009)
directed by Wes Anderson
[the Royal Tenenbaums/로얄 테넨바움] 이후로 그닥 인상적이지 못했던 Wes Anderson 감독이 과거의 총명함을
다시 보여준 영화가 유명한 동화작가 로알드 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은 의외이긴 했다.
블랙 코미디가 전편에 흐르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생존권을 박탈당한 동물들의 '생존'에 처절한 이야기이고,
동시에 다시는 야생의 본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과, 야생의 삶에서의 끝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 지를 얘기하는
결코 가벼운 발랑발랑 애니메이션이 아니다.(폭스가 늑대를 보고 마지막에 흘리는 눈물과 그를 응원하는 제스쳐를 보면 가슴이 찡하다)
야생동물들의 처절한 생존권에 관한 블랙 코미디라고 할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이건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히 침범한 거대 자본들에 대한 우화일 수도 있다.
공동체와 개인을 파괴하며 사유조직을 자본으로 무장하는 지금 우리들 세상이 이 애니메이션엔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으니까.
아무튼 범상치 않은 놀라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16. [의형제] (2009)
directed by 장훈
장훈 감독과 김기덕 감독에 대한 기사가 나가면서 이런저런 말이 많다.
그 이면엔 장PD에 대한 얘기도 있는데 이제 알 만한 사람들 알겠지만 이건 ㅅPD와 김기덕 감독의 문제이고,
또다시 그 뒤에는 S배급사의 황당한 작태가 있다고 본다. 항간에는 김기덕 감독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고들 하나
당연히 고집할 부분을 고집했다고 말하는 이들의 의견에 훨씬 무게가 실린다.
아무쪼록... 장훈 감독과 김기덕 감독은 이미 화해를 했다고 하니 김기덕 감독님도 상심을 벗고 예전처럼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다. 이미 그분 아래있던 감독들이 서서히 한국 영화의 미래들로 대두되고 있지 않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감독인 장철수 감독도 그렇고.
아무튼 [의형제]는 송강호와 강동원의 앙상블의 힘이 제대로 발휘된 독특한 영화다.
이 영화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지만 이데올로기 이전에 사람이 먼저라는 지극히 평범한 보편적 진리를 실감있게 다룬다.
물론, 난 지금도 정말 이데올로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명제가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게 가능한 얘기야?'라고 반문할 지도 모르지만,
여기선 빨갱이 새끼들이라고 거침없이 내뱉던 송강호와 비록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이유로 '주체사상'을 입에 담는 강동원이지만
맞부대끼고 지내면서 한 인간의 삶과 사고를 통으로 지배하는 사상적 울타리를 뛰어넘는 교감을 갖는다 .
상당히 오버인건 알겠는데 그럼 난 현실 세상에서 나에게 되묻는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라고.
정말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랑 내가 친구가 되는 게 가능한 일일까?라고.
15. [How to Train Your Dragon/드래곤 길들이기] (2010)
directed by Dean DeBlois, Chris Sanders
애니메이션이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영화라고 치부할 시기는 오래 전에 지나갔다.
쉽게 다가오지만 메시지도 명확하고 상상할 수 있는 걸 구현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까지 이뤄진 터라
애니메이션이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의식은 무궁무진해졌고. 놀라운 CG 퀄리티로 날 놀래킨 이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는
나와 다른 존재와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립하는 것보다 이해하는 방법을 '용 길들이기'라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얘기한다.
반목한다는 이유로 정의 또는 생존권을 가장한 명목으로 무력을 행사하려는 바이킹족의 이야기는
딱... 지금 시절의 초라한 종이강대국의 모습과도 오버랩되고.
다른 걸 떠나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놀라운 몰입도와 [아바타]를 발라 버리는 놀라운 활공 액션이다.
우스꽝스럽거나 귀엽기까지한 용들의 활공 액션은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며, 후미 꼬리 한 쪽을 잃어 주인공과
보조를 맞춰야만 제대로 날 수 있는 설정 또한 의미하는 바가 크다.
물론... 민성군의 말에 의하면 이 영화는 동화와는 설정만 비슷할 뿐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고.ㅎㅎㅎ
14. [Fish Tank/피쉬탱크] (2009)
directed by Andrea Arnold
[Wendy and Lucy/웬디 앤 루시]에서 우린 아무 것도 가진 것없이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디스토피아를 향해
정처없이 눈동자의 촛점을 잃은채 내몰리는 주인공을 바라본 바 있다.
우린 이 모든게 정치와 상관없다고 믿곤 한다. 저 개같은 정치인들로부터 신경만 끄면 될 거라고 생각해왔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들의 행위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실제 삶에, 그것도 끼니를 떼우는 일에 엄청나게 관련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와 내 자식이 미래에 걸 수 있는 희망의 동앗줄도 그들의 행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비극은 그저 우리 삶과 우리 삶의 주변에서만 벌어진다.
나와 정치와의 갈등이 아니라, 내가 소속한 가정과 학교 또는 직장, 이웃등의 준거집단에서의 갈등으로 말이지. 그 결과 피폐해지고 쓰러지는 건 개개인이다.
[피쉬탱크]는 댄서를 꿈꾸는 거칠지만 오히려 순수한 미아(케이티 자비스)의 며칠간의 좌충우돌을 묵묵하게 따라간다.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 보내야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한 번 춤을 추는 것 뿐.
동생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사라지는 미아의 모습은 아주 깊은 여운을 남긴다.
13. [Up in the Air/인 디 에어] (2009)
directed by Jason Reitman
하루가 멀다하고 무너지는 수많은 업체들, 그 와중에 보다더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시행되고 몸담고 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사람들. 이 영화는 그렇게 쫓겨나는 사람들이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쫓아내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것도 아니다. 라이언 빙엄(조지 클루니)는 구조조정 대상자들에게 해고를 통지하는 당사자지만
그는 그 회사와는 그닥 관계도 없는 파견회사 용역일 뿐이다. 해고조차 떳떳하게 자신들이 하지 못해 대행업체를 부르고 이렇듯
라이언 빙엄같은 해고전문가가 횡행하는 현실이 지금 미국의 현실이다.
그 와중에 해고통지를 받은 이들은 암담함에 정신적 혼란을 일으키기 마련이고, 그런 이들의 표정을 이 영화는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씁쓸한 건, 해고하는 자와 해고당하는 자가 있음에도 정작 정말 이들 뒤에서 해고를 종용하는
근본적인 당사자와 시스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말도 안되는 해고 이후의 라이프플랜을 던져놓고는 수용하라는 모습은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구조조정이 비일비재한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그닥 다를바 없다.
영화 속에서는 해고를 하는 자와 당하는 자에 대한 대립적 이야기가 아니라 이 영화는 경제 불황으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이 그들이 아메리칸 이데올로기로 숭상하기까지 한 '가족 시스템'마저 붕괴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이 거대한 시스템의 희생자임을 모른채 스스로를 다그치고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물론 영화는 그들의 모습들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그리지도 않고, 희화화하지도 않는다.
그 덕분에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의 관계와 이들이 대상을 해고하는 모습 역시 설득력있게 느껴진다.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연민이 없다면 만들 수 없는 영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마지막 라이언 빙엄의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 중 한 편.
12. [Sin Nombre/신 놈브레] (2009)
directed by Cary Fukunaga
도대체 남미에 무슨 일이 생긴걸까.
콜럼비아의 마약 운반의 잔혹한 현실을 보여준 [Maria Full of Grace]와 브라질의 빈민촌의 만연한 폭력을 묘사한
[City of God/씨티 오브 갓]을 필두로 남미가 어떤 현실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많은 영화들을 이젠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 그래도 우린 저 모양이 아니라 다행이다'... 이런 위안?
늘상 반복되는 말이지만, 국가가 사회적 안전망을 방치했을 때 민초들에게 어떤 삶이 펼쳐지는
지는 지난 20년간 남미 국가들이 신랄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저 잔혹한 현실이 일말의 과장도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은 보는 내내 마음을 갑갑하게 한다.
극적인 느낌을 위해 설정된 커플의 이야기는 초반 쉽게 몰입이 힘들었지만 살인과 폭력을 통해 성장하는
저 아이들의 눈 속에 비쳐진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이렇게 현실 고발적인 영화들이 우리들 주변에 수없이 펼쳐지고, 서점에선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해주지 않은 23가지'가 베스트셀러를 질주하는데... 정말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서서히 변화할 수 있을까?
단지 깨어있는 집단 지성만으로?
11. [Winter's Bone/윈터스본] (2010)
directed by Debra Granik
암담한 소녀 가장이 헤쳐나가야하는 매몰찬 현실을 러닝타임 동안 목도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리 역을 열연한 제니퍼 로렌스의 놀라운 연기도 인상적이지만 사라진, 아마도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아버지를 찾아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진 지역의 범죄 공동체를 헤집고 다니는 비참한 현실로부터 이 영화는 그 어떤 책임없는 희망따위는 얘기하지도 않는다.
시스템이 공적인 책임을 거부하거나 방임하기 시작할 때 빈곤을 감당해야하는 건 바로 아이들 자신이고,
그런 세상에서 아이들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을 온 몸으로 맞닥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데브라 그래닉 감독은 이 지난한 소녀의 여정을 동정을 빼고 좇아간다. 다큐의 형식도 결코 아니지만,
영화 속의 현실이 미국의 현실에서 그닥 멀리 있는 것도 아닌 터라 이 영화의 리얼리즘에 대한
해외 평론가들의 평가는 그야말로 찬사 일색이었던 것 같다.
과연 이 영화가 국내에 개봉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런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 없다는게 답답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