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종종 난 식구들과 외식을 한다.
형편이 그닥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라 어쩌다 외식 한번 합니다만 그것도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
대단한 외식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제겐 분명히 만만한 비용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만한 비용을 지불하고 얻는 즐거움이 있어 외식을 하곤 한다.
새해에 몇가지 다짐을 한 것이 있는데 3년이 넘도록 외식비에 많은 지출을 하던 것을 2010년엔 확실히 줄이자는 것도 그 다짐 중 하나다.
aipharos님과 얘기도 나누면서 우리 나름대로 결심을 한 것인데,
의도적인 전세계적 기아 상황에 대한 무관심등의 이른바 '진부할 수 있는 이유'가 그 배경이 된 것도 사실이다.
미식은 기호의 문제이고 일정 수준의 생활 수준이 되는 국가에선 더이상 생존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그와 동시에 여전히 그런 '생활 수준이 되는 국가'라는 곳에서 먹거리를 걱정하고 '푸드 마운틴'이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음식 쓰레기산을 뒤져
가족들에게 가져가는 구조적 기아의 현실이 공존한다는 사실도 역시 알고 있다.
장 지글러의 이 책은 그간 내가 알던 지식을 더욱 넓혀줄만큼 폭넓고 깊은 내용을 다루진 않는다.
대부분은 나와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지만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내 아들에게도, 다른 아이들에게도 읽게 할 수 있는 쉬운 책이기도 하다.
유엔의 식량조사활동가로 활동하면서 전세계의 비정상적인 기아 문제에 대해 자기 아들과 얘기하는 식으로 접근한 이 책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동시에,
장 지글러의 개인적 체험이 덧붙여져 그 진솔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비록 책의 성격상 아주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아프리카, 동남아의 구조적 문제를 적절히 짚어가며 그 뒤에 도사리는 거대한 탐욕 자본과 제국주의적 시스템, 신자유주의라는 허울로 금융자본에 휘둘리는
이른바 '선진국'들에 대한 이야기를 잘 섞어 이야기하는 능력은 정말 대단한 경지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식량만으로 전세계가 먹을 수 있으며,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곡물만으로도 유럽 전인구가 먹을 수 있는 현실에서,
60억 인구 중 8억 이상이 심각한 기아에 시달리고 비타민A의 부족으로 실명하거나 5초에 어린 아이 1명이 사망하고 있다는
이 납득할 수 없는 시스템에 대해 장 지글러는 차분차분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수도없이 접하게 되는 이러한 빈곤기아국에 대한 '구호품'이 왜 제대로 그 역할을 다할 수 없는지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장 지글러는 이 책을 통해 감정을 누르고 단 한번도 봉기론적인 어투로 얘기하지 않는다.
분노하기 이전에 너무 참담하고, 현장에서 수없이 보고 겪은 처절한 아픔을 통해 기아에 굶주리는 이들에 대한 인간적 연민과 자성적 태도로 덤덤하게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화법은 읽는 이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오게 된다.
또한 중남미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아옌데 대통령의 사망의 원인이 미국의 금융자본과 다국적 기업으로 유명한 네슬레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으며, 서남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의 젊은 대통령으로 4년간의 놀라운 개혁 끝에 절친한 친구이자 참모에게
살해당한 상카라와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읽는 이들에게 '진실'에 대한 양심적 분노를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순히 '기아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구조적 기아가 야기된 이면에 숨겨진 신자유주의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독버섯처럼 이젠 지구의 북반구마저 뒤덮은 거대한 마수와
그 마수의 주체인 금융자본과 엄청난 이윤을 올리는 다국적 기업의 농간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얘기하려 한다.
어쩌다 식구들과 연인들과 하는 좋은 '파인 다이닝(Fine Dining)'.
식구들과 연인들, 지인들, 친구들의 분위기를 더욱 화기애애하는 사랑스러운 자리임에 틀림이 없고, 그러한 생활을 삶의 낙으로 여기는 이들 또한 비난할 마음은 결코 없다. 내 스스로가 그 부분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서있지도 않고 내 신념을 인문학적 지식으로 재단할 능력은 더더욱 없으니까.
다만, 조금 더 신중하게 먹거리를 선택하자는게 우리의 결론이다.
외식을 줄이자만이 아니라 먹거리를 조금 더 신중하게 선택하자는 것. 한 명이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지만 적어도 한명 한명이 실천하다보면
지금은 패해도 희망을 볼 수 있고, 최소한 희망을 볼 수 있는 세상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다.
일부 대학에 입점했으나 프랜차이즈에 참패하고 패퇴한 생협. 지금은 몇 년동안 지지부진이고 그 부진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마트에 길들여지고 동시에 자본에 종속되고 삶의 터전이 붕괴되고 역으로 수많은 이들이 다시 푼돈받고 서비스업에서 종사할 수 밖에 없는
자본의 악순환고리가 이어져가는 현재를 보면 개개인의 최소한의 실천 방식이 곧 사회 참여이고 희망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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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불의에 눈감은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으로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이 있다.
이미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었으며 이 중에는 위에 언급한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가 피노체트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인해 축출되고 살해당하는 과정도 언급된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에 취임한 후 가장 먼저 한 정책 중 하나는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매일 0.5리터의 우유를 무상공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칠레의 목장과 유통망은 이미 다국적 기업은 네슬레가 장악한 상태였고 칠레 정부의 우유 구매 요청에 네슬레는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무상으로 달라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그 이유는 다들 눈치채시듯 한 국가의 성공사례가 다른 나라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냉전시대 미국이
공산주의 국가들의 확장을 일컬은 '도미노 현상'마냥 두려워했고 미국과 프랑스, 다국적 기업의 꼭두각시 독재자들이 좌지우지하던 이웃국가들은
당연히 이러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정책을 '포퓰리즘' 또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비난했다. 한국에서 아이들 무상급식을 거부하는 정부와 한나라당, 조중동의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결국 아옌데는 희대의 독재자 중 하나인 피노체트 쉐리에게 살해당한다.
묻고 싶다.
아이들에게 그들을 위해 무상급식을 해주는 것이 정말 시장 자유원칙을 희석화시키고 그 아이들의 의지를 박약하게 만들어 의존적 인간을 만드는 것인지.
자본주의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를 내재하고 있어서 당연히 보완적 정책을 사용해야하는 것인데, 지금은 '서비스를 위한 자유', '자본을 위한 자유'를 외치며
모든 걸 시장 '자유' 원칙에 의해 해야한다는 이 병신같은 발상이 대중에게 먹힌다는게 도대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인지 말이다.
무상배급의 말만 나오면 '좌빨', '빨갱이', '북한으로 가라'는 병신 개망나니같은 소리나 짖을 줄 아는 인간들이
나와 같은 땅을 밟고 사는 사람 중에 이토록 많다는 것도 구역질이 난다.
북유럽 국가들이 자국민에 한해 행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시스템은 조금도 따라할 생각없이 자본주의가 마치 민주주의와 동의어인양 떠드는,
점점 더 고래고래 소리치는 목청좋고 가슴은 없는 동물들이 지들끼리 주고 받고 싸우는 꼬락서니를 보니... 더더욱 경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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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TV 광고 중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이 흘린 돈을 아버지가 발로 밟고는 자기 돈이라고 우기고, 그래야 돈을 번다고 한다고.
그런 말을 너무나도 당연한 듯 밝은 분위기로 이 광고는 얘기한다.
내가 정당하게 가진 돈이 아닌 돈을 자기 돈이라고 우기는 것은 사실 '강도질'이다. 광고 하나에 뭐그리 민감하게 구느냐고 할 수 있지만
이런 광고를 보면 이런 정서가 자연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지금 사회의 모습을 쉽게 알 수 있다.
나 자신도 하나 추스리지 못하면서 헤매고 있지만, 가끔 아들 민성이를 보면 이제 경쟁의 정글로 내몰리고 살아나갈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면 속이 답답해진다.
이 사회에서 '무한경쟁'이란 이름으로 당연시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우리의 가치관, 나아가선 우리의 기본적인 심성까지 개악시킨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것엔 '중간'이란 것이 없다. 그래서 중산층은 붕괴되고 '도 아니면 모'라는 식의 경쟁과 도태만 존재한다. 아니라고 해봐도 소용없다.
나 자신은 그런 현상과는 상관없다고 외면해도 역시 소용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사회는 벌써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
실업률 5%라는 지나가는 변견도 웃을 말도 안되는 통계따위, 걸핏하면 서민 일자리 창출 15만개, 20만개라고 떠드는 개소리, 아이들이 사회성을 익히기도 전에
이미 학원으로 챗바퀴 돌 듯 돌면서 교우를 통한 사교성을 상실하고 자신을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현상등 우리 주변에 무한 경쟁이라는 허울좋은 구호 아래
헤드기어와 보호구도 없이 링 위에 올라 수퍼헤비급 맨손 파이터와 맞부딪히는 걸 '경쟁'이라고 떠드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그 누구라도 신자유주의의 낙오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