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오를랑(Orlan) 테크노바디展을 다녀왔다.
페미니즘이란 말만 꺼내도 남성들로부터 쌍욕을 얻어먹기 십상인 이 어처구니없는 나라, 페미니즘과 여성가족부가 같은 정신을 내세우는 것으로 오해되기까지하는 이 어처구니없기 짝이 없는 나라에서 종교, 남성기득권에 의해 맘대로 재단되고 규정되어온 여성성을 혁파하려는 오를랑의 시도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면서도 아이러니하더라.
제대로 사안을 판단할 수 없는 여러 부조리한 장치들 (예를들면 남자에게 주어진 병역의무, 자잘하게는 백화점의 여성전용주차장, 흔히 얘기하는 된장녀, 김치녀등) 만을 빌미로 마치 여성의 권리가 남성과 동등함을 넘어 남성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정말 쉽게 볼 수 있는 웃기는 나라.
여성들의 구직활동 및 사회활동이 남성들에 비해 분명히 제약되어있고 노동의 댓가 역시 공정히 주어지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하여 일부 여성들이 결혼 상대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으로 남성의 경제력을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다 싹... 거세하고 오로지 '돈만 밝히는 한국 여성'이라는 문제만 난도질해대는 이상한 나라.
할 말은 너무나도 많지만...
아무튼 성평등에 관한 담론과 철학이 우리보다 훨씬 진일보한 서구사회에서조차 오를랑 같은 혁명가가 나와야했는지 한번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사실 이건 남성들을 위한 전시다.
*
한가지.
이날 오전 기온은 이미 29.7도였고 비가 내릴듯 습도가 매우 높아 엄청... 더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곡미술관 본관은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2층 전시를 볼 때는 더위를 정말 잘 견디는 와이프까지 부채질을 하며 힘들어했다.
무료전시도 아닌(물론 무료전시여도 이렇게는 안돼지) 유료전시에서 이런 찜통 속에서 작품을 관람하라고 하는 성곡미술관이 난 도통 이해가 안가더라.(전시장엔 창문 하나 없지 않은가)
스탭에게 '여긴 에어컨을 안틀어주나요?'라고 물었더니 적정 온도가 안되면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는 말에 기가막혔다.
물론 스탭은 대단히 친절했고 대단히 미안해했으니 이건 죄다 이 미술관의 정책때문이겠지.
웃긴건... 신관은 또 1층에 에어컨을 틀어놨다는거.
더 웃긴건 신관 1.5층, 2, 3층은 또 에어컨이 나오지 않았다는거. 찜통 그 자체.
성곡미술관.
10시도 되기 전 도착.
전시시작.
오를랑 테크노바디 1966-2016
(ORLAN Technobody Retrospective)
"나에게 예술이란 일종의 저항이다.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지며, 기존의 규범과 상식을 뒤흔드는 것이다. 예술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거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위험을 무릅써야만하고,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한다." - 오를랑.
오를랑의 전시를 보면서 고백컨대,
내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이었던 20대의 사고를 다시한번 되뇌어봤다.
'혼수용 천으로 벌인 우연한 스트립 쇼' (1974-75)
여성을 성녀와 창부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반발한 오를랑은 혼수용 천을 이용해 처음에는 성모로 분장하였다가 점차 옷을 벗으며 창부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남성의 시선에서 재단된 여성성이라는 것의 이중성과 허구를 비판하는 작품.
상당히 강렬하면서도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
가면으로 정체를, 손으로 성기를 숨긴 누드.
Nude Pose with Mask Hiding Identity and Hand Covering Up Sex
(1965)
외모, 성에 따라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남성 중심적 규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서구사회에서 이 문제가 아직도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상당한 성과도 있었던 것에 반해 지금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더 노골적이고 반평등적으로 심화되고 있지 않는지 묻고 싶다.
헝클어진 채 거꾸로 된 머리와 마스크.
1977년 '예술가의 키스' 퍼포먼스.
자신의 키스를 5프랑에 파는 행위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본관 2층으로.
에어컨을 틀지 않아 찜통 그 자체였다.
무료관람이어도 이래선 안된다...싶은데 여긴 유료관람이면서도 이 찜통에서 전시를 관람하라니...
십자가를 든 순결한 동정녀 (1983)
White Virgin Playing with Two Crosses
오를랑은 종교의 권력을 남성의 권력과 동일시했다.
물론 나 역시 이 관점에 철저히 동감한다.
가슴을 드러낸 순백색의 마리아.
깊은 곳을 생각하는 순결한 동정 (1983)
White Virgin Thinking About the Fold
아... 끝내준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성형 수술-퍼포먼스'.
자신의 몸을 신체개조하는 수술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저 영상은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불편한 지점을 오를랑은 의도했다고 본다.
수술에 앞서 만찬을 즐기는 오를랑.
그녀는 국부마취를 한 뒤 진행되는 수술에서 피부가 절개되는 도중에도 위제니 르무안-루치오니(Eugenie Lemoine-Luccioni)가 쓴 저서 '드레스 (La Robe)'에서 발췌한 부분을 낭독한다.
피어나는 (Blooming)
난 이 사진 앞에서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표와 변종 (2013)
Mutant(s) Landmark(s)
오를랑은 이주증명서가 없는 난민들과 이미 국적을 취득한 마르세이유 이민자 24명과 인터뷰한 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본국의 국기를 각각의 얼굴 위에 차례로 지나가도록 연출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소속된 나라와 소속되지 않은 나라가 서로 영향을 주며 겹쳐지고 국기가 얼굴 위에 오버랩되면서 이들의 피부색도 계속 변화한다.
대단히...
정말 대단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여성혐오가 횡행하는 사회는 반드시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배타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이주민에 대한 혐오, 경제적 약자에 대한 혐오, 자신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혐오.
이제 덥디더운 본관을 나와서
신관으로.
그래도 신관 1층은 에어컨을 틀었다.
물론... 딱 이곳만 틀었지.
AUGMENT
이곳이 작품들은 오를랑의 <베이징 오페라> 시리즈로 증강현실이 적용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닥 감흥없다.
물론 증강현실없이 이곳의 작품만을 놓고 본다면 무척 인상적이지.
MYO 팔찌를 찬 오를랑의 양방향 게임 실험 (2015)
오를랑의 아바타가 인간이 되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자신의 신체조각들을 찾아내 완전한 몸을 완성하는 게임.
MYO 팔찌를 통해 실제 플레이할 수 있다...
하지만...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반응하는 MYO 팔찌는... 어지간한 여성들에겐 너무 크다.
인식 자체가 안된다.
그래서 내가 해봤는데...
원래 이런 게임에 익숙하기도 해서 잘 할 자신도 있었는데 ㅎㅎㅎ
MYO 팔찌 인식도 한방에 되어 해볼만하다 싶었는데 이후에 무반응.
스탭분 말로는 이게... 자주 이렇게 반응을 안해서 그냥 데모를 틀어놓는다고.ㅎㅎㅎ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비디오 게임을 접목했는데 컨트롤러가 작동하지 않아 만들어진 데모만 봐야한다는 것이.
그리고... 여기 에어컨이 안나와서 저 MYO 팔찌에 땀이 찬다. 아... 정말...
뒤에 보이는 모습이 게임에서 모든 parts를 찾고 미션 클리어했을 때 보여주는 완벽한 신체.
2층에선 성형수술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와이프는 이거 당연히 못보고.
난 끝까지 다 보고 싶었는데...
에어컨이 안나와 이 사우나 방에선 도저히 볼 자신이 안나더라.
아... 인간적으로 창문도 없는 전시실에 에어컨은 좀 틀어요. 이게 무슨.
아... 이 좋은 전시를 에어컨 불만으로 마무리하다니.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