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테리오스 폴립 / Asterios Follip」, 데이비드 마추켈리 著

 

 

 

 

 

이 놀라운 책을 왜 이제서야 읽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동시에 이렇게라도 읽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하는 생각도 든다.

마블 코믹스를 통해 명성을 쌓았던 데이비드 마추켈리가 2009년 발표한 이 책은 심오한 철학적 내용들을 외피에 걸치고 있으면서 불완전한 존재, 결핍된 존재가 서로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고 소통해나가는 과정을 자신만의 알찬 내용물로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수많은 건축 공모전에 입상하여 명성을 날린 건축가이며 이타카에 위치한 코넬 대학의 교수를 역임할 정도의 지성인이지만 정작 그가 설계한 건축은 단 한번도 실제로 지어지지 않은, 전형적인 페이퍼 아키텍처 (Papaer Architecture) 건축가다.
온갖 해박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자신만의 논리로 타인은 물론 가치관까지 재단하며 세상을 흑백 논리에 가까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그는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오만하고 외곬수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하나'라는,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혼에 이르게 된다.
늘 부모의 관심 밖에서 성장해온 하나와 그 반대로 거의 모든 가치 판단을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폴립은 이토록 판이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서로의 관계를 유지해나가지만, 하나의 예술성을 인정하는 안무가의 등장을 통해 하나가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되면서 우리가 로맨스를 주제로 한 수많은 책과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질투'라는 균열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예상할 수 있듯, 그런 과정 끝에 폴립과 하나는 헤어지게 된다.
이 책은 폴립과 하나가 이미 헤어진 이후의 시점부터 이야기가 진행되며, 폴립이 낯선 곳으로 도망치듯 떠나 머물게 되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중간중간 등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신만의 세상 안에 두른 커다란 울타리 너머의 세상은 발 한번 내딛지 않고 곁눈질로만 바라보고 재단해오던 폴립은 부인 '하나'와 헤어진 후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거대한 상실감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과 논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 거대한 상실감과 맞닥뜨린 폴립은 낯선 곳에서 자신이 거들떠보지 않았던 가치, 사람들과의 간극을 조금씩 허물어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내가 판단하기론 폴립은 끝까지 자신만의 관점과 시선으로 주변의 모든 일들을 판단하고 사고하지만, 타인을 이해하는 대신 그 존재의 방식, 가치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그 구닥다리 태양광 자동차를 몰고 달려나가지 않겠는가.

 


결국 이 책은 '사랑'이야기이며 동시에 폴립이 자신과 달리 태어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또다른 쌍둥이 형제로 인하여 결핍된 자아, 과잉된 자아를 조금씩 극복해내는 일종의 '성장' 이야기다.
페이퍼 아키텍쳐러에 머물던 그가 처음으로 작은 오두막을 짓고 계단에 앉아 있는 모습,
비현실적이면서도 복잡한 조형을 구현하던 하나가 명료하고 간결한 이미지의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헤어진 이들이 결핍된 감정 속에서 오히려 더욱 닮아가는 성장의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폴립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를 표현해내는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독보적인 작화 역시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기억되도록 하는데 최소한의 컬러만을 사용한 채도가 낮은 - 주로 핑크 계열의 - 컬러, 등장인물마다 다른 폰트를 사용하여 폰트마저 이미지화한 독창성, 논리적인-자신만의- 폴립을 표현할 때마다 그를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그려낸 표현법등은 이 책의 가치를 그야말로 독보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생각이 들게끔한다.

 


이 모든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 책이 현학적인 느낌이라곤 조금도 없이,
읽을 수록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거라 생각되네.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은 아름다운 책.


*
스포일러 때문에 얘기하지 못하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일부 소개 기사에 부제로 '사랑은 담배마저 끊게 만든다'라는 글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 판에 박힌듯한 신파적인 문구는 놀랍게도 이 책에서 매우 진실성있는, 대단히 뜨거운 감정적인 한방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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