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때 지금 대안공간 아트포럼 리의 원장인 이작가와 같은 반이었다.
그때 역시 화가이신 그 친구 아버님의 아뜨리에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2층에 있던 릴테입 데크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작가는 그때 조그마한, 다이어리 사이즈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를 방에 갖고 있었는데
하루는 거기에 김수철의 '못다핀 꽃 한송이' 테이프를 넣곤 플레이해서 듣곤 했다.

이상한 건 오디오 시스템은 우리 집이 훨씬 비교도 안되게 좋았는데, 난 그 친구 집의 방에서
그 조그마한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해 나오는 김수철의 '못다핀 꽃한송이'와 '별리'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집에서 들어보면 그 느낌이 전혀 살지 않아서 실망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 사실 팝음악과 록음악만 거의 듣던 내가 가요를 좋아한 것도 드문 일이었고.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갖고 있을 것 같다.
새끈한 수입차보다 친구의 터덜거리는 자동차를 타고 지방 드라이브를 갔던 기억,
브라운관 TV에 비디오 플레이어로 지글거리는 영화를 보며 감동하던 기억,
라면 끓는 소리가 들리는 LP를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 누워 감동하며 듣던 기억,
부산 국제시장의 추례한 골목 여관에서 돈이 다 떨어져, 허름한 식당의 청소를 하는 조건으로 볶음밥을
얻어 먹던 기억...

물론 난 그 경험들이 가져다 준 마치 신기루와 같은 이미지를 동경하고 싶진 않다.
다만, 흔히 말하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느낀 여러 감흥들이 다 각각의 폄하할 수 없는
의미를 갖고 있고, 내가 그걸 존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이작가의 집에서 들었던 '별리', '못다 핀 꽃 한송이'와 우리집에서 들었던 그 음악들은 똑같은
음악이었지만 그 음악을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는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음악을 함께 듣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그 모든 경험이 총체적으로 감상의 행위로 구현된
듯 했다.

문화라는 건 어디까지나 대면자의 향유방식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 한다.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생략한 이들은, 문화를 존중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발하는 것 같다.
쉽게 내뱉고, 자신의 성에 차지 않으면 가차없이 비난한다.
하지만, 과거의 문화 향유 방식이 아예 사라져버릴 우리 아들 세대에 그러한 미덕을 강요하는 것은
사실 넌센스다.

그래서 가끔 고민한다.
Kings of Convenience와 These New Puritans를 너무 좋아하면서 역시 빅뱅의 '거짓말'에 환호하는,
다른 문화의 향유 방식도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우리 아들 세대를 보면서,
충분한 다양한 문화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주어야 하는 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그 문화들에 대해 어떻게, 강요와 설득없이 스스로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줄 지에
대해선 아직도 난 해답을 모르겠다.
만약 누군가 뭘그리 어렵게 생각하느냐, 내버려두면 다 알아서 찾아간다고 말을 한다면 난 정말 그럴 수
있는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인가? 그리고 그만한 다원적 문화가치를 옹호해줄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와 의식이 갖춰져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단순히 문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누리면서 체험한 모든 경험들을 소중히 할 수 있는 것
그만큼 중요한 배움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