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준화 학교로 전교 100등까진 SKY에 진학했던 고등학교.
내가 다닌 고등학교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 당일 첫날부터 자율학습을 한답시고 복도 철문을 걸어잠그는 놀라운 포스를 발휘한 학교. 아무 생각없이 놀다가

1학년 첫 시험에서 중학교 때 전교등수보다도 낮은 반 석차를 기록, 내가 스스로 처음으로 성적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학교.

(다음 시험에서 그 반석차를 바로 전교석차로 바꿔버림, 이런 내 포스는 겨우 고등학교 2학년 5월까지만 이어짐)

공부가 당연한 일상인 급우들.
어디 친구 하나 사귀기 힘들어, 지금 생각해보면 1학년은 아니어도 2~3학년 때 난 왕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았다. 뭐 지내는데 힘든 건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이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다.
원 세상에... 명문은 야구부가 있어야 한다나?
그래서 만든 야구부.
전국대회에 나가려면 다른 고등학교와 예선 2파전을 벌여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상대 학교야말로
야구로서는 그래도 잔뼈가 굵은 학교.
연전연패...
야구부에 들어가는 돈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많아졌는데 성적은 늘 지역 예선도 통과못하니,

당연히 당시의 대붕기나 화랑기..등 마이너한 대회에 줄곧 나가게 되었다.

우리 반에도 야구부원이 있었는데 이들은 절대 수업을 듣는 일이 없었다.
3학년까지 끝까지 수업을 들어오지 않았다.
시험만 보러 들어오는 그들은 당연히 후다닥 찍고 OMR카드를 내고 사라지던지,

아니면 실컷 자다가 종이 울리기 전에 OMR 카드를 내고 나가곤 했다.
사실 지금 난 야구부원 급우들의 이름을 두 명 빼곤 기억도 못한다.
그리고 그들과 얘기한 기억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좀 얘기를 많이 했던 야구부원이 한 명 있었다. 그를 K라고 하자.

K는 준족에 안타를 양산하는 타자로 학교에선 2학년때부터 붙박이 주전이었다.
그는 나와 2,3학년 모두 같은 반이었는데, 평소에 매우 조용하고 수줍게 웃는 친구였다.
하지만 시합에선 그는 학교 야구부의 주전력이었는데, 고3때 반드시 전국대회에서 실적을 내야만
대학을 갈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대단히 신경질적으로 돌변했던 기억이 난다.
안타깝게도 우리 학교는 전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2명 정도만 대학 진학을 한 것으로 난 기억한다.
K는 대학을 가지 못했고, 프로야구의 지명도 받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야구선수로는 왜소한 체격이었다는 거였다(키가 172cm즈음인 걸로 기억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쯤 후에 부천의 모시장에서 일수 가방을 허리에 메고 지나가는 그를 봤다.
나와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지나가려는 듯 했다. 난 나도 모르게 반가와서 그를 불러 세웠다.
한... 2분인가 채 되려나 하는 시간동안 그는 내 말에 웃으며 대답했지만 내게 시선을 집중하지 않았고,
빨리 가봐야 한다는 말만 되뇌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바보같이 '여기 시장에서 일하는거야?'라고 물어봤을 때 K가 내게 '응, 그럼 내가 뭐
어디가서 일할 때가 있나'라고 대답했는데 그 말을 하고 그는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그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 시장에 갈 일도 없었기도 하고...


난 중학교 때도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역시 중학교 때도 그들은 수업에 들어온 기억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만약 초등학교 5학년부터 야구를 했다면, 무려 8년이란 교육 시간에 운동만 하고
졸업을 했다는 말이 된다.

일본 아다치 미스루의 만화를 보면 수업 들을 거 다 듣고... 시험 제대로 보고, 방과 후 운동에 전념하는 등장인물들을 보게 된다.

우습게도 일본 지명과 캐릭터명을 모두 그대로 써야하는 규정이 생기기 전까 이들은 모두 한국 이름을 가진 캐릭터였고,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이노우에의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강백호와 서태웅, 그들의 학교가 때론 상북, 때론 북산고교가 된 거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인터하이(전국 대회 출전권)를 위해 지역에서 무려 30여개 학교가 예선전을 벌인다는 말도 안되는 상황, 그리고 전국 고교 야구팀이

5,000개에 달한다는 더 말도 안되는 사실(우리나라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당시 전국 54개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장면이 아주 종종 나온다는 거... 등등이었다.

인기가 가장 좋은 스포츠 중 하나라는 야구도 이 모양이다.

자신이 아직 미래의 꿈을 그리긴 해도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기 너무 힘든 나이에 운동을 시작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도록 엇나간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리게 하는 우리나라의 스포츠 교육은 그 자체가 폭력이자 광기다.
스포츠를 선택한 이가 다시 이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으려면 남들보다 터무니없이 많은 희생을 해야
하며, 그런 이유로 어린 학생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운동에만 매달리고, 그 꿈이 꺾이면 심하게 낙오된다.

이건 단순히 교육 행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적 방임이자 폭력이다.
빈약한 토양 위에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일부 선택받은, 그야말로 선택받은 선수들의 예를 들며,
시스템의 문제를 은폐하고 스포츠에 전념하는 학생들 개개인의 능력 문제라고 무조건 자유경쟁을
핑계로 둘러대는 이런 악습에 희생되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이제 정말 사회적으로 다시 한번 해봐야 할 것 같다.

일본의 야구 협회 관계자가 얼마 전 우리나라 기자에게,

'일본은 교육의 연장선으로서 스포츠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정말 그렇게 하고 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난 전적만으로 한국의 야구 실력이 일본과 차이없이 동등하다고
정말 기자님은 생각하세요?'

라고 말한 기사가... 자꾸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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