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er the Void/엔터 더 보이드]
directed by Gaspar Noé
Nathaniel Brown, Paz de la Huerta, Cyril Roy
2009 / 161분 / 프랑스
우리에겐 미카엘 하네케과 함께 종종 문제적 감독으로 일컬어지는 Gaspar Noé(가스파 노에)의 2009년작이다.
워낙 과작하는 감독이어서 사실 1998년 [Seul Contre Tous/I Stand Alone] 이후로 따지면
고작 [돌이킬 수 없는] 이후에 두번째 영화일 뿐이다.
영화 제작은 석달간의 촬영을 거쳐 2008년 5월에 마무리했으나
추가적인 촬영을 들어가서 2009년에 이르러서야 개봉이 되었고, 국내엔 아직 미개봉이다.
사실 워낙 직접적인 환각 체험과 적나라한 섹스씬이 많은데다가 러닝타임이 무려 160분(2시간 40분)에 이르기 때문에
국내 개봉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가스파 노에의 영화를 보고 혼란스러워하거나 긴 여운을 느끼는 것은 그의 영화가 지향하는 이야기들이 기본적으로
삶의 허망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미천하고 통제력없는 동물인지에 대해
언제나 여지없이 통렬하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이미 관습적, 암묵적으로 합의한 도덕률들을 그는 정반대편에 서서 거침없이 얘기할 뿐 아니라
내러티브의 서사구조를 비틀거나 환치해 표현하기 때문에 그로인해 화학효과가 유발되는 드라마적 힘이 필수적으로 수반되는데
이러한 드라마의 구조를 통해 관객들은 혹시 가스파 노에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갖게되곤 한다.
물론 이러한 뻔한 기대는 언제나 여지없이 깨지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가스파 노에의 이런 시선을 '불쾌한 기억'쯤으로 치부하기엔 사람들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공감의 여지들이 영화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와 관객을 놀래키기 때문에 관객들은 치부를 들킨 사람마냥
화끈거리는 심정을 들킨 듯 곤혹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가스파 노에를 스타덤에 올린 영화는 아무래도 모니카 벨루치의 충격적인 강간장면이 있었던
[Irréversible/돌이킬 수 없는]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기존의 도덕적 기준에 대해 심각하게 혼란을 겪게하는 문제작이자
과거 스펙트럼 DVD에서도 국내 출시했었던 [Seul Contre Tous/ I Stand Alone]로 이미 해외에선 그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 바 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무겁고 차가운 파리의 도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다수가 인정하지 않는, 혹은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가치관에 대해 반대편의 위치에 서서
자신의 소신을 지탱해야하는 그 격한 외로움과 무거운 고독을 이고 사는 주인공의 흰머리, 그리고 그의 독백을.
그의 2009년작 [Enter the Void]에는 전작 [돌이킬 수 없는]에 참여했던 촬영감독과 Daft Punk의
Thomas Bangatler의 이름을 여전히 찾아 볼 수 있다.
영화의 촬영은 거의 대부분 일본에서 되었으며, 후기 촬영시에는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곤
모두 일본 현지의 스텝을 고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전작에서 시간의 역순을 좇아 가끔 보여줬던 부유하는 듯한 크레인 샷을 이 영화에선 비주얼의 핵으로 사용하는 동시에
마약에 의한 수많은 환각적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그래픽 작업을 병행했다.
주인공 오스카가 죽기 직전까지는 대부분 철저한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페이크다큐의 헨드 헬드 시점이 아니라 인간의 눈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그가 DMT라는 마약을 한 이후에 빅터에게 빅터의 마약을 전해주러 가는 과정등은 영화를 보는 이가
마치 마약에 쩔어 stoned 될 법한 대리체험을 대단히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오스카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이후부터는 오스카가 또다른 약쟁이 알렉산더가 권한 불교 관련 책에 담겨있던 불교의 윤회사상과 결부되어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죽음의 세계로 가지 못한 채 동생 린다의 주변을 맴도는 부유하는 시선으로 철저히 처리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크레인샷과 미니어쳐 항공 촬영은 거의 정점을 이루게 되는데 워낙 엄청난 속도감과 앵글이 무중력 상태에서 둥둥 떠다니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보는 내내 현기증을 느낀 분들도 적잖이 있을 것 같다. 특히 커다란 화면으로 감상할 경우 이러한 멀미 유발은 그 정도가 더더욱 심해졌을 듯.
aipharos님도 보는 도중 어지럽다고 얘기할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부유하는 오스카의 시선은 포스트 모던의 정점을 이루는 도쿄의 밤거리를 통해 환타지와 현실이 모호하게 혼재될 정도로
극명하게 비춰지게 되는데, 이런 점들을 고려해 가스파 노에가 로케이팅 장소로 도쿄를 선택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다.
그의 전작인 [돌이킬 수 없는]에는 대부분 인공조명을 사용했지만 도쿄의 네온사인이나 불빛은 이미 가스파 노에가 원했던 필름의 이미지에
거의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Enter the Void]는 정말 최소한만의 조명 추가로 촬영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약에 대해 유럽의 여느 국가보다 비관용적인 일본의 분위기는 등장 인물들이 경찰을 만나고
긴장하는 모습을 연출할 때 효과적이고 적절한 텐션을 주기에도 충분했다고.
하지만 이 영화는 배경만 철저히 도쿄일 뿐이지 등장 인물들의 대부분은 서양인이고 등장하는 일본인이라고는
수동적인 룸메이트나
먹이사슬의 상부에 있는 마약 딜러의 약에 쩔어 언제 저 세상으로 갈 지 모르는
정신못차리는 게이 파트너 정도로 축소되어 있어서 어찌보면 철저히 이방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타국에 왔지만 3류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는(일반적인 시선의 입장에서) 오스카와 린다는
오스카가 죽기 전 동생 린다를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만약 자신은 죽더라도 다시 여동생 린다를 지키기 위해 돌아올 거라고
약속하고, 린다 역시 그런 오빠를 사랑하지만(여기엔 확실한 근친상간의 코드가 있다.
보호집착이 성애가 된 경우라고봐도 무방하다) 정작 오스카가 죽고 난 뒤 오스카가 허공에 부유하면서
바라보는 린다를 비롯한 오스카와 관계있었던 이들의 삶은 오스카가 집착했던 자신의 가치를 무너뜨릴 정도로
허망한 모습들만을 보여준다.
오스카가 부유하는 그 시간동안 그와 관계된 모든 이들은 심리적인 파국을 향해 치달아대고 그토록 집착했던
린다 역시 그 모든 이야기들을 허망함으로 몰아 넣어버린다. 아... 딱 enter the void 아닌가.
이토록 허공을 부유하며 자신의 주변인들을 개입할 수 없는 현실에서 바라보는 오스카는
과연 알렉스가 그에게 전해 준 책에 있었던 윤회사상처럼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을 했을까?
남겨진 자들의 심리적 파국이 그가 존재했다면 겪지 않았을 일들이라고 그가 생각할 수 있을까?
심지어 자신의 유골이 하수구에 던져지는 모습을 바라보고나서 그가 느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더욱 혼란스럽다.
그것은 그가 가진 기억이 소멸되는 과정일까, 아니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일까.
러브 호텔의 벽을 넘어 부유하면서 시공을 초월해 섹스를 하는 이들을 위에서 바라보는 후반부의 롱쇼트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오스카가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일상성을 모두 포기하고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듯한 이 장면은 어찌보면
그야말로 멸망과 혼돈에 관한 씬일 수도 있고, 역으로 이야기하면 정 반대의 의미를 둘 수도 있다.
묘하게도 이 두가지를 다 느껴버린 나는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혼란스러움이 여전했다.
뚝심있게 무려 2시간 40분동안 이렇게 신경계를 파고드는 환각제의 느낌처럼 부유하는 영화 속 장면과 장면의 전환은
크레인샷이나 환각의 이미지, 그러니까 사이키델릭(Psychedelic)의 이미지로 연결되곤 하는데 나중에는 어느 정도의 인내심을 요하기도 한다.
형언하기 힘든 체험을 하게 하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고,
형언하기 힘든 혼란을 주는 영화인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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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아이디어는 Robert Montgomery(로버트 몽고메리)의 47년작 [Lady in the Lake]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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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힘들 정도로 전라의 스트립쇼와 정사씬등을 정말 놀랍도록 소화한 Paz de la Huerta는
고만고만한 역을 맡던 배우였으나 뉴욕에서의 오디션 후에 발탁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