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Bruges] directed by Martin McDonagh
2008 / 약 107분 / 영국, 벨기에
일찍이 세계적으로 저명한 마케팅 전문가인 알 리스는 벨기에야말로 타고난 천혜의 아름다움을 국가적 마케팅의 실패로
폄하받고 있는 '어리석은' 국가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어느 책에서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납니다...
오래된 일이라, 아마도 'Positioning(포지셔닝)'에서였던 것 같아요)
그만큼 벨기에는 아름다운, 유럽 전역을 통털어서 대표 도시 20위 안에 네개의 도시를 랭크시킬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관광객이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적은 나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핀란드처럼 국민들이 외지인에 대해 무뚝뚝한 것도 아닐테고...
아무튼 벨기에는 아름다운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나라로 다녀오신 분들의 칭찬이 자자...한 나라같네요.
전 벨기에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주말에 집에서 편히 쉬면서 영화를 보고 음식을 해 먹었습니다.
어머님께서 극장에서 보시고 재밌다고 '강권'하셨던 [추격자]를 봤고, [Chaos Theory]를 봤고, 조금 전에
콜린 파렐, 브랜던 글리슨, 랄프 파인즈 주연의 [In Bruges]를 봤습니다.
[추걱자]는 팽팽한 긴장감이 대단했습니다만, 세간의 극찬만큼은 아니었어요. 적어도 제게는 말이죠.
그 정도의 서스펜스는 쉽지 않지만, 아주 전형적인 방식이어서, 아니 너무 전형적이어서 도리어 덤덤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엔 그러한 감각마저 무뎌지더라구요.
물론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만... 김윤석씨와 하정우씨의 연기도 아주 좋았구요. 다만, 제가 그간 짧게
봐오던 김윤석씨의 가공할 연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김윤석씨의 연기가 범상함의 기준까지 넘어섰던
것은 [천하장사 마돈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튼 이런 건방진 얘기는 각설하고.
중세건물의 보존이 유럽에서 가장 잘 된 도시 중 하나라는 벨기에의 브뤼헤(Bruges)가 이 영화의 배경
입니다. 살인청부 후 브뤼헤에 잠시 머물고 있으라는 해리(랄프 파인즈)의 지령을 받은 두 명의 살인청부
업자 켄(브랜던 글리슨)과 레이(콜린 파렐)는 브뤼헤의 한 작은 호텔에 머물게 됩니다.
브뤼헤의 지나치리만큼 평화로운 정경이 오히려 부담스럽고 따분한 레이는 불평만 하지만, 그러던 중
우연찮게 클로에(클레멘스 포시)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고 데이트를 하게 되죠.
사실 레이는 어느 신부(특별출연인 듯한데, 저도 좋아하는 Ciaran Hinds입니다)를 살해하는 일을 맡지만
전혀 의도하지 않은 어린 아이를 실수로 숨지게 합니다.
그 때문에 그는 상당한 정서적 불안을 보이게 되지요.
전혀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켄과 레이는 어떤 이유에서 단 하나의 접점을 갖게 됩니다.
그건 용서받지 못할 세 명의 서글픈 비극의 시작일 수도 있구요.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용서받지 못한 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Unforgiven]을 이 영화에 붙여도 무방할 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영화엔 [In Bruges]란 제목만큼 어울리는 건 없을 거에요.
레이는 영화 내내 브뤼헤를 조소하고 폄하합니다.
하지만, 그건 레이가 브뤼헤의 평화로운 정경을 차마 바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일 거에요.
실제로 이 평화로운 브뤼헤에서 레이가 맞닥뜨리는 상황들은 모두가 관광객 또는 이민자들과의 문제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클로에로부턴 따뜻한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되지요.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레이가 그가 조롱하는 따분한 도시 '브뤼헤'에서 발을 뗄 수 없는 이유 역시 똑같이
외지 사람들 때문이라는거에요.
(아... 정말 영화 내용 말안하고 쓰려니 너무너무 힘듭니다)
이 영화는 IMDB에 키워드가 코메디, 크라임, 드라마로 되어 있던데 어떻게 봐도 코메디는 어울리지 않아요.
조금만 봐도 이 영화가 보통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영화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중반 이후에는 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동시에 상당한 긴장감을 주기도 하구요.
이 장면의 진정성은 정말 무거운 것이어서, 저 용서받지 못할 자들의 고뇌와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줄
정도로 묵직한 감정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브랜던 글리슨의 연기는 정말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보는 콜린 파렐의 연기는 자신의 모습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후반부에 냉혹한 얼굴을 드러내는 랄프 파인즈 역시 그 전 시간에 목소리로 떼운 것을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의 아우라를 뿜어냅니다.
특히 후반부, 켄이 레이가 한 말이라고 얘기했던, '현실이지만 꿈같다'라는 표현이 그대로 재현된,
켄과 해리가 다른 의미로 똑같이 말했던 '브뤼헤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도시'라는 이 모든 이 영화의
스쳐 지나가던 말들이 현실로 구현된 장소에서의 마지막 씬은 정말 안타까우면서도 매혹적입니다.
이런 드라마틱한 이미지가 구현된 영화를 도대체 얼마만에 보는 지 모르겠네요.
제게는 올해의 BEST 중 한 편으로 반드시 남을 것 같아요.
국내 개봉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보실 수 있다면 어떻게든 보시라고 꼭 권하고 싶어요.
*
영화에서 켄과 레이가 들른 미술관은 아무래도 Groeninge Museum 같습니다.
브뤼헤는 플랑드르파의 대표적 작가인 반 다이크가 활동한 중심지이기도 한데요.
묘하게도 이 영화에선 반 다이크의 작품이 아니라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이 영화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반 다이크의 리얼리즘 전통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사실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들이잖아요.
미술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면 아마 한번쯤은 다들 들어보셨을거에요.
브뤼헤의 평화로운 정경을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현실은 악마같은 꿈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보슈의 작품들은 언제나처럼 '무섭고 두렵죠'.
현재의 죄악에 괴로워하는 이들은 결국 이 작품들의 공포에서 자유롭기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아...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작품들은 켄다로우 미우라의 어두운 코믹스 '검풍전기 베르세르크'의
작화적 모티브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검풍전기 베르세르크'를 보시는 분이라면 보슈의 작품들과의
연관성을 눈치채실 거에요.
켄과 레이가 주의깊게 본 건 이 작품입니다. '최후의 심판'이란 작품.
보슈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미술과 놀이,2005년
아, 보쉬 얘기를 aipharos님과 하다보니 2005년에 민성이와 한가람 미술관에서
스티브 화이트하우스 영상작품 [Kunstbar]를 정말 많이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보슈의 음료를 먹고 떨어지는 지옥도를 무섭다기보다 '우습다' 라며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
이 영화엔 아주 잠깐 등장하는 Ciaran Hinds외에 Peter Dinklage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배역은 레이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어요.(영화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_-;;;)
***
아주 민감한 대사들이 많은 이 논쟁적일 수 있는 놀라운 영화의 감독은 Martin McDonagh(마틴 맥도너)로
영국 감독입니다. 저와 동년배군요. 사실상 첫 장편데뷔입니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낼 지 놀라울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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