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람시는
'모든 사람은 지식인지만 모든 사람이 지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옥중수고 2'에서
얘기한 바 있다.

세상이 허구적 지식인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겠지만,
현재의 지식인을 정의하는 기준이 도대체 무언지 무척 난감하다.

[Half Nelson]에서 Ryan Gosling이 연기한 주인공은 911 이후 좌절에 빠진 지식인의 서글픈
자화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머릿 속은 기계적인 지식으로 가득 차 있으나 문제는 그 가운데
실천과 비판이 누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가슴은 누구보다 뜨겁지만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Fast Food Nation]의 철없는 학생들처럼
치기로 무언가를 이룰 만한 의지조차 다 박탈당한 그야말로 '박제된 지식인'의 그 정형을 보여준다.

빔 벤더스는 미국에 대한 애증의 연민을 품고 그 길고 긴 장정을 따라 지금도 혼돈과 부조리,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덮힌 미국을 필름에 담는다.
그가 바라보는 미국은 허무와 강박의 거대한 이미지 그 자체다. 그런 미국을 가감없이 비판하지만,
어쨌든 빔 벤더스의 시각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시각을 내가 땅을 딛고 사는 이 곳으로 돌려 보면 나 역시 무기력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나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과 동시에 설익은
지식으로 각개의 사안에 이중잣대를 들이대거나 합리화시키는 것 이외엔 사실 하는게 없다.
음악, 영화, 미술... 닥치는 대로 단지 머릿 속에 주워 담고 있는 것 같은 이 허망함은 괜히 어설픈
자의식만 더더욱 키워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이런 사람들을 오타쿠라고도 부른다.
오타쿠들이 형식적인 내재성을 열을 올린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뿐이 아니라 그 말이
튀어나온 일본에서조차도 마찬가지인 시선이다.
가이낙스의 안노 히데아키가 발표했던 91년작 [오타쿠의 비디오]는 음지 속에서 거대한 개개의
무리를 이루던 오타쿠라는 뉴타입을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본 자전적 이야기다.

난 이런 오타쿠들이 현재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과거 미친 듯이 first pressing을 구할 때 그 많은 해외 샵에서 날 일본인으로 기억한 것은
그런 수집열을 보여준 것이 대부분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스노비스트들이 현학적인 지식으로 자신을 과시하려고 한다면, 오타쿠들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그만한 댓가를 치룬다는 점에서 확실히 구분이 된다.
그런데...
요즘엔 오타쿠나 스노비스트의 구분이 정말 모호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나 스스로도 오타쿠와 스노비스트 사이에서 어정쩡한 느낌이 드니까.
하지만 난 어떤 방향으로든 이러한 지적 편향성은 예기치 못한 생산물을 가져 온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산물은 70년대말 미국의 독립 상영관을 중심으로 모인 관객들이 스스로를 그루핑하고
영화를 재해석하여 만들어낸 컬트 문화와 같은 자발적인 생산물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난 지식인이 어떤 범주를 갖고 어떤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지 모른다.
물론 몇몇 책에서, 혹은 웹에서 긁어 모은 자료들이야 읽어보지만 난 스스로 정의내릴 수 없다.
다만, 지금의 지식인이란 과거처럼 지식인다운 역할을 해나가는 것엔 별 관심이 없고 거대한
연극 속에 함몰되어 행인 1, 2의 역할을 맡은 것처럼 허우적거리는 박제화된 지식인이라는
생각만 잔뜩이다.
나처럼 '건전보수...라는 개소리는 잠꼬대에서나 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꿰차고 있던 주머니를 조금씩 여성들에게 환원하는 것이 배아픈 남성들이 이를 항변하는
여성들을 페미니스트로 묶어버리고 냉소를 보내는 것이 몰상식한 짓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겠냐마는... 그 어느 곳에서도 주목할 만한 '무브번트'라는 생산물은 보이질 않는다.
스노비스트들의 긍정적 역할은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마이너리티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이고, 오타쿠들의 긍정적 역할은 무정부주의 아니 무국적주의적 성향, 심도있는
관점과 정서가 문화적 다원성을 보다 여유롭게 한다는 것에 있다고 난 생각해왔다.

난 아직 문화적 마이너리티에 대한 식견도 부족하고, 직접적으로 몸을 담지도 않은 채 멀찌감치
외부에서 들여다 보는 차원이지만 이렇게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다양한 지식인의 스펙트럼들이
하나의 집중된 움직임을 보여줘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거야 말로 지식인다운 역할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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