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BRINA, Nick Drnaso

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arte

2019년 12월 30일, 2020년 새해가 이틀 앞으로 다가온 날의 아침.

미국 텍사스의 교회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나 최소 2명이 사망했으며 1명이 부상당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엽총을 든 남성이 미사 도중에 걸어나와 총격을 시작했다고 한다.

 

 

 

 

 

닉 드르나소의 이 책 [사브리나]는 그래픽 노블로는 처음으로 2018년 맨부커상 후보작에 올랐다.

그래픽 노블도 엄연히 만화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만 엄연히 만화의 하위장르가 아닌, 독자적인 하나의 장르가 된 지 오래.

나 역시 대단히 많다고 할 순 없지만 꽤 여러권의 그래픽 노블을 갖고 있다.

늘 얘기하듯 가장 애정하는 [아스테리오스 폴립 Asterios Polyp]도.

누구나 손쉽게 맘만 먹으면 원하는 수준에 '근접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손에 넣은 정보의 질, 정보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과대하게 유통되면서 자본주의의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 과장되고 비틀어진 정보들까지 그만큼 많아졌으니

대중은 결코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기 곤란할 때 당신은 그 정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까.

누군가는 정보에 대해 판단을 보류하고 입을 다물 것이고,

누군가는 그 정보를 진실이라고, 혹은 허위라고 확신한 뒤 적극적으로 입을 열 것이며,

누군가는 정보의 진위에 대해 나름의 노력을 다해 알아볼 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렇게 전달된 정보라는 것은 대체로 그 속에 내용의 대상이 되는 인간이 존재한다.

정보는 텍스트나 영상, 음성의 형태로 유통되어 소비되지만 이 정보의 내용 속에는 대체로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린 정보를 수용할 때 그 속의 인간에 대해 별다른 인식없이 정보의 진위 여부, 선정성등에만 관심이 있다.

아니라고 말하기 힘든 것이 우린 여전히 정보의 헤드라인만 보고도 열렬하게 기사 검색이나 클릭을 하고 있지 않나.

닉 드르나소의 [사브리나]는 아무런 이유없이 살해된 사브리나의 주변 인물들이 피폐해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을 잃었을 때 주변 인물들이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은 감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이 더더욱 읽는 이의 감정을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게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너무나도 확신에 찬 허위가 주변 인물들을 겨냥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들이다.

그런데 이 믿기 힘들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확신에 찬 허위들의 공격은 우리도 지난 몇 년 간 우리 사회에서 무수히 반복되어온,

익숙한 일이 아닌가 싶어.

자식을 잃은, 가장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당한 유가족들이 온갖 유언비어에 휘둘리며 피해자가 오히려 자식의 죽음으로 기득권을 누린다는,

도저히 인간의 짓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공격에 지금까지 괴로워하고 있지 않나.

게다가, 그 비극의 원인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책임자로부터의 사과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음에도 대중들은 '이제 그만하자.

할 만큼 하지 않았냐'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내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사브리나]는 관계의 신뢰가 어떤 방향으로든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현대 사회가 가진 평온한 일상 속의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신뢰라는 것은 깊은 인간 관계 속에서 구축되고 유지되는 것만은 아니며 상대에 대한 배려심과 적당한 공감 능력을 통해서 구축되는 사회적 약속으로부터 출발한다.

정보가 일방적으로 수용자에게 전달된다고해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심과 공감 능력이 존재한다면

일방적으로 선정직인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여 칼이 되는 경우는 덜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마지막 몇 장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내게 [사브리나]는 절망적이다.

지독하리만치 절망적이다.

그림체는 철저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절제되어있다.

그 어떤 컷 하나 자극적인 장면이 없다.

이 정도의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 선정적이라고 생각될 만한 그 어떤 장면, 아니 뉘앙스조차 없다.

프레임의 앵글은 놀라울 정도로 연극적이다.

그 끔찍한 일상이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전달되는 그런 느낌마저 준다.

내가 저 고통을 보고 저 고통의 일상에 동참하게 되는 시린 느낌을 내내 받게 된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관계는 피상적이다.

살갑고 깊은 관계와 반대되는 의미의 피상적 관계라는 말이 아니라,

이건 사회화 과정에서 훈련된 피상적인 행위들이라는 의미다.

작품 후반부 코너라는 등장 인물이 주인공에게 전하는 말은 무서울 정도로 서늘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보고 겪고 있는 이 땅 위의 수많은 [사브리나]들이 떠올라 소름끼쳤다.

그래, 이동진 씨의 서평처럼 [사브리나]의 충격적인 이야기는 형태를 달리하며 지금 이곳에서도 수없이 반복되고 있겠지.

대단히 힘들지만 반드시 읽어보시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우리 사회의 지독할 정도로 솔직하고 처절한 자기 고백이다.

+

내 손 안의 스마트폰은 엄청난 정보의 바다를 선사한다.

그런데 가끔 궁금하다.

스마트폰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정보, 컨텐츠는 내 감정을 대단히 분절적으로 파편화하고 감정의 지속성을 완벽하게 차단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슬퍼하고 애도하는 마음을 갖지만

이내 곧 같은 화면에 보이는 다른 뉴스나 컨텐츠를 보고 불과 몇 초 전까지 느꼈던 슬픈 감정을 한 순간에 리셋해버린다.

온갖 종류의 정보와 컨텐츠에 따라 춤을 추다가 언젠가는 어지간한 수위로는 감정의 변화도 크지 않은 상태가 되는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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