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보기 힘든 약간 옛날 얘기들.
갑자기 생각나서 써본다.
아마 이렇게라도 기억하지 않으면 나조차 잊어버릴 지도 모를거란 생각도 든다.

 

 
*
25살 즈음.
그당시엔 divx 화일이란 것이 단순히 상업적 프로젝트의 일환이었고 대중들은 전혀 그 존재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국내에서 개봉되거나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는 영화들을 찾아서 본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는데

1. 어둠의 경로(천리안,하이텔,나우누리,유니텔등)의 장터를 통해 복사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하는 경우

2. 대학로의 모희귀비디오샵(이곳은 지금 영화기자로 이름을 날리고 자신의 사이트를 오픈한 L모씨가
   주단골이었다) 씨네마테크등의 영동이나 일부 학교 근처의 예술영화 비디오점에서 역시 복사 비디오테이프 를 대여받아보는 경우.

3. 직접 해외에 주문하여 받아 보는 경우

주로 위의 세가지 방법으로 영화를 봐야했다.

국내에 출시된 비디오라도 [a Midnight Clear/휴전], [Blow Up/욕망], [the Warriors(이 영화는 96년 즈음
재출시)]등의 희귀비디오는 '영화마을'에서나 볼 수 있거나 영화마을에서도 못구하면 영화마을 선릉 본점을 찾아가서 봐야했다.

난 워낙 일찍 해외mail order를 시작한지라 (관련글보기) 대부분 해외 Laser's Edge같은 mall에
LD와 VHS를 주문해서 받아보곤 했다.
당시에 내 방이 작지 않았고 방에 오디오 시스템과 프로젝터를 모두 갖추고 있어서 영화를 보러 우리집에
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었고, 우리집에 일단 오면 영화를 보고 본 영화는 대부분 공VHS에 담아서 선물로 주곤 했었다.
물론 mail order를 위해 방에 FAX와 내 방 전화번호를 따로 갖고 있기도 했다. 

 



**
당시에 남산의 괴테 인스티튜트, 그러니까 독일문화원에선 매주 수요일마다 독일의 실험영화들이나 단편,
장편영화들을 두달여에 걸쳐 상영해주곤 했는데, 아마도 아직까지도 내 머리 속에 강하게 인상지어진 경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독일어를 모르는 나로선 영어 자막이 나왔다말았다하는, 프랑스 문화원과 달리 맨바닥에 그저 옛날 학원에서나
사용하던 접이식 의자를 주르르... 놓고 프로젝터를 통해 보여주는 그 영상을 제대로 보기위해 기를 쓰고
앞자리에 앉았던 기억도 난다.(그래봐야 오던 사람이 20여명 남짓이었다)
뒤에 앉으면 높낮이 차이가 없어서 앞사람 머리때문에 영상이 보이질 않았으니까.
나야 영화만 보러가고 끝나면 바로 나왔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그 자리에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이 있었더라.
나중에 알고나서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
서울의 A대학 앞에 B라는 예술영화 대여 비디오점이 있었다.
난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다가 뭐가 있나...싶어 올라가 봤더니 내가 보고 싶었으나
아직 해외에서 구입하지 못했던 Greg Araki와 Hal Hartley 감독들의 영화가 공테이프에 라벨링된채 모두 있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에 한 편에 2,000원(그때가 95년인가... 그랬다)씩 5편 정도 빌려서 집으로 왔는데, 그중 한 편이
Jim Jarmusch의 [Down By Law]였다.
문제는 이 다섯편의 영화들 화질이 모조리 다 경악스러웠다는거다.
특히 [Down By Law]는 주인공들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면이 일그러졌다.
늘 집에서 LD, VHS로 보던 나로선 '이런 화질로 영화를 보고 좋다고 하는거야?'라는,
일종의 충격을 받았는데 그건 이른바 '빽판'으로 음악을 듣는 경험에 절대로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열악한 현실이더라.
그뒤로 난 정말 선의에서 그 B라는 대여비디오점을 찾아가 집에 있던 수많은 원본정품영화들을 하나둘 VHS에
담아 아무 댓가를 요구하지 않고 하나둘 갖다줬다.
아마 그 당시에 난데없이 화질 좋은 [Beyond the Valley of the Dolls]나, [10000 Maniacs], [Nekromantik]등의 영화들을
이런 곳에서 구해봤다면 아마도 내가 배포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_-;;;

한가지 기분나빴던 것은, 내가 아무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그 B샵의 젊은 쥔장은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정말로 내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다.
솔직히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보기 힘든 영화들 열악한 화질로 보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일 한다...고 생각
하고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내가 일이 있어 아무 영화도 못챙겨서 2주만에 그 B샵에 들렀는데
다짜고짜 그 B샵의 젊은 영화를 공부한다는 그 젊은 쥔장이 내게 오더니

"김OO씨, 왜 이제 오세요? 김OO씨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곤란한 줄 알아요?"  

 

라는거다. 영문을 몰라 무슨 단속이라도 떴나...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더니 그가 하는 말이...

"김OO씨가 주기로 한 영화들로 대학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연락도 없이 이제오면 영화제는 어떻게 합니까!"

라는 거다.  기가막혔다.
그들은 내게 단 한번도 영화제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다음에 올 때 이런이런~ 영화들을 갖다주겠다고 한 것 뿐인데, 이젠 고맙다는 말은 커녕
나 때문에 일을 망쳤다는 소릴 들으니 한마디로 꼭지가 돌아버렸다.
그 뒤로 물론 난 다신 B샵에 가지 않았다.
돌이켜보건데, 정말 기분 나빴던 것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언제나 씨니컬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그 주인장의 태도였던 것 같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 대한 리뷰들을 봤을 때 그 씨니컬한 표정과 너무나 잘 매치되는 현학적 수사들을 읽고
그럼그렇지...하는 씁쓸한 웃음이 나오기도 했으니까.
가끔 지금 그 사람은 뭘할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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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이런 오래된 씨네마 키드로 지낼 시절의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오늘 aipharos님과 본 Guy Maddin의 [Brand upon the Brain] 영화 덕분이다.
곧 감상문을 올릴텐데, 수많은 상징으로 점철된 이 놀라운 비주얼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와 음악에 정말 미쳐 살던 내 20대 중반이 떠올랐다.
내 20대 중반에서 후반까진 언제나 말하지만 내 기억에서 도려내버리고 싶은 창피한 기억들로 가득하지만,
20대 초중반의 나는 어리석었지만 정말 지독하게 음악과 영화를 탐닉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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