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희야 / a Girl at My Door>

정주리
2014 / 120min / Korea

배두나, 김새롬, 송새벽, 손종학, 김민재,  장희진,

엄연히 지정되어있는 주차 구역을 멋대로 무시하고도 일말의 미안함이 없는 이웃.
새벽 2시가 넘도록 쿵쾅거리며 자기 할 일은 다하는 아랫집.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고 맘대로 창밖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는 인간.
아주 간혹... 엘리베이터에서까지 담배를 피우며 내려오는 인간.
새벽 1시가 넘도록 동네가 떠내려가라 동네 길목에서 떠들며 웃는 보행자.

가끔 내가 비정상적인 것인지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예전엔 '아... 저런 무개념 인간들'하는 마음에 화가 났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하도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니 '대부분 다 그런가보다'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어요.
가끔 무섭습니다.
내 주변만 해도 이렇게 기본 개념마저 실종된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그런데 내가 힐난하는 그 사람들도 평소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힐난에 대해 그들은 '뭐 별 것도 아닌데 그러냐'라고 말하기 일쑤죠.

정주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도희야>는 내가 혼란스러웠던,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어떤 로직으로 비상식과 부조리를 방관하며 용인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가치 판단에 있어 인본주의적인 사회적 도덕률이 개인의 생존 안위를 우선시하는 논리에 짖밟혀 물리적, 정서적 폭력을 집단적으로 방관하고 묵인하는 우리의 이웃들,

그러니까 로버트 레드포드가 보여줬던 '보통 사람들 (ordinary people)'의 민낯을 드러내는 부분에 이 영화는 주력하고 있습니다.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과 방관, 침묵이라는 점은 <김복남 살인사건>과 소재적 유사성을 띄는 것이 분명해보이지만

극단으로 치달아버리는 <김복남 살인사건>과 달리 <도희야>는 관객과의 정서적인 교감을 더욱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인지 주인공 영남(배두나)의 심리와 그녀가 행하는 행동이 관객들에게 대단히 자연스럽고 설득력있게 비춰지죠.
밀도있게 축조된 이야기가 점차 현실에서 탈선하여 장르적 외피만 잔뜩 껴입고는 좌충우돌하던 <김복남 살인사건>과 달리 <도희야>는

그 이야기가 격심한 풍랑에 수몰되지 않도록 끝까지 단단히 이야기의 끈을 부여잡습니다.

영남(배두나)은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입니다만 극초반에 잠시 언급되듯, 어떤 개인적인 문제로 인하여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한적한 시골 바닷가의 파출소장으로 좌천됩니다.
그녀를 걱정하는 선배와 문성근씨가 분한 경찰고위직의 조언대로 영남은 1년 정도만 이 한적한 파출소장에서 보내다가 다시 서울로 복귀할 계획이었죠.

(정말 그럴 마음이었는지는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받는 중학생 소녀 도희(김새론)를 알게 되고 영남은 도희를 그녀의 의붓아버지인 용하(송새벽)로부터 보호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약간의 권한 그리고 그녀 자신의 정의감에 의해 그녀는 단호하게 행동하죠.
하지만 영남이 용하에 대해 단호한 결정을 내릴수록 영남을 바라보는 마을의 분위기가 애매해집니다.
명백히 용하가 도희에게, 그리고 그가 부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다들 알면서도

마을의 대소사까지 다 챙길 수 있는 젊은 사람이 용하밖에 없다는 핑계로, 그가 없으면 마을이 돌아가질 않는다는 핑계로 다들 용하의 폭력을 방관하는 것이죠.
게다가 용하는 영남이 이 한적한 시골마을 파출소장으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던 사적인 문제까지 알게되어 이를 빌미로 영남을 협박하기에 이릅니다.

<도희야>에서 폭력에 노출되어, 폭력에 길들여진 도희, 그리고 도희를 보호하고자하는 영남,

그리고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고용주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외국인 노동자는 모두 보통사람과 거리가 있습니다.
사회적 인습의 차원에서 분명 보통사람과 거리가 있다는거죠.
보통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이 보통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다져놓은 부조리의 시선과 맞닥뜨리게 될 때 그들은 또다른 폭력에 의해 지쳐갑니다.
자신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과 행동이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것으로 내몰리며 비뚤어진 시선으로 난도질당하는 경험을 했을 영남의 입장에선

그녀를 향한 '적당히 다치고 도망치려고 한다'는 은정(장희진)의 힐난이 무척 억울했을 것 같아요.
보면서... 정말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_-;;;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고 정의로운 행동이 지탄받고 부당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를 우린 이 사회에서 너무 자주 목도하고 있거든요.

<도희야>를 보면서 전 <김복남 살인사건>보다는 <한공주>가 훨씬 강하게 떠오르던데, 영화의 형식미등에선 공통점이 그닥 느껴지지 않지만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이라는 점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공주>가 연상되었던 것 같네요.

무척... 완성도 높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적인 재미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배두나, 김새롬, 송새벽... 이들의 연기 앙상블이 대단히 좋아요.
아마 근래 본 그 어떤 영화의 배우들이 이루는 화학반응보다도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배두나씨가 보여준, 체념한 듯 하면서도 단호한, 감정이 서서히 진폭을 크게 울려가며 미세하게 표정으로 새어나오는 그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었네요.
그녀의 연기는 늘 인상적이었지만 한단계 더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새벽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전의 캐릭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그저 깐죽거리던 예전과 달리

이 영화에선 언뜻 정말 평범하면서도 악한 모습을 너무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어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송새벽씨가 연기한 용하...라는 캐릭터가 자신이 한 짓이 조금도 나쁜 짓이 아니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하는 것인데

이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거였죠.

그리고... 김새롬.
아직 어리기만 한 그녀의 발전을 보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고, 또 즐거움 같습니다.
다만, 이 영화 속에서 그녀의 연기는 무척... 힘들었을 것 같아요.
aipharos님도 말했지만 보면서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들더군요.



*
kmdb를 보면 정주리 감독의 전작은 무려 5년 이상 지난 2008년에 발표한 단편 <11>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한적한 바닷가 마을의 여성 파출소장이 주인공이에요.
단편 <11>을 보지 못해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이 단편영화와 <도희야>는 분명히 연장선상의 이야기인 듯 합니다.


**
영남의 비밀을 풀어줄 상대로 은정역의 장희진씨가 잠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잠시 등장하지만 제게는 엄청난 임팩트를 안겨줬어요.
개인적으로 장희진씨를 무척... 좋아하거든요.ㅎㅎㅎ 특히 2006년 정경호씨가 주연배우를 맡았던 <폭력써클>에서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답니다.
당연히 장희진씨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출연하는 지도 몰랐습니다)
이 영화에서 유난히 그 매력이 작렬하는 배두나씨와 같이 나오는 투샷을 보니 이거 너무 심한 미인 두명...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바닷가에서 이 둘을 뒤에서 잡은 투샷은 둘 다 너무 아름답구나...란 생각이 먼저 들더라구요.
영화 몰입을 오히려 방해합니다.ㅎㅎㅎ


***
이 영화의 기획 크레딧에 이창동 감독님의 이름 석자를 볼 수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님의 <시>를 보고 받았던 그 충격은 아직까지도 생생해요.
(개인적으로 이창동 감독님의 모든 영화는 물론 한국 영화의 베스트 중 한편을 뽑아보라면 전 주저없이 <시>를 선택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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