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重版出来!'(2016 일본 TBS 방영)를 다시 정주행했다.

다시 봐도 즐겁게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드라마는 대부분의 일본 드라마들이 드러내는 고질적 단점들을(어디까지나 우리 관점에서 봤을 때) 고스란히 껴안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시장 점유율 1위인 엠페러와 만년 2위 주간 바이브스가 보여주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대결 구도.

엠페러의 직원들은 하나같이 야비한 행위를 태연하게 저지른다.

경쟁사의 작가를 빼내오고 서점에 진열된 책들을 자신들이 출간한 책 위주로 몰래 손을 본다든지 하는 짓을 반복하지.

우습게도 만년 2위이자 이 드라마 주인공의 무대인 '주간 바이브스' 편집장을 비롯한 직원들은 상대적으로 말도 안될 정도로 선한 성인들의 집합체.

자기들끼리 종종 티격태격하지만 그 안에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주간 바이브스 편집자 중 상대적으로 냉혈한이라 볼 수 있는 편집자 야스이의 경우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야스이라는 인물의 아픈 과거를 나열하며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정도로 만들어준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봉합되는 갈등의 해결 역시 대부분의 일드와 비슷하다.

갈등 당사자들이 순식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타인을 이해하게 되지.

이런 갈등 해결이 뭐가 문제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우린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결코 타인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어쩌면 사회 생활이란 것은 나와 타인이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니라 상대할 사람과 상대하지 못할 사람을 구분하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울림을 준다.

주간 바이브스의 직원들은 하나같이 선량하기 짝이 없는데 이런 편집자의 모습들이 우리가 원했던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기대하고 싶었던 관계의 모습이기도 한 이유로 쉽게 감정 이입되면서 결국 그들 한명 한명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에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가 가장 격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주간 바이브스'라는 회사의 사무실을 대충 예쁘고 깔끔하게 흉내낸 가짜 사무실이 아닌 진짜배기처럼 만들어낸 디테일이다.

드라마 속 '주간 바이브스'라는 편집부 사무실의 모습은 종종 증폭되는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몸짓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현실감이 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을 이해하고 그 공간 속에 배치된 기물과 사람의 관계가 대단히 자연스럽고 유기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어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일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간 바이브스의 편집자처럼 일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사무실만이 아니라 서점의 이벤트 매대, 행사장(특히 행사장의 조명), 이 드라마를 위해 제작된 책 표지들, 지하철 광고등등도 모두 가짜가 아니라 진짜처럼 느껴질 정도로 공을 들였다.

그래서 나카타의 '피브 전이'가 출간될 때 실제로 정말 책이 나온 듯한 느낌이 들지.

연애가 주업, 일은 부업같은 우리네 드라마와(물론 지향점이 다르다곤하지만)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공간의 맥락을 읽어내고 표현하는 힘이 아닐까 싶었다.

연애 얘기가 나왔으니...,

이 드라마 속에는 로맨스가 없다.

우리나라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사실은 로맨스가 본 책이고 업무가 별책부록인 것과 달리 '중쇄를 찍자'에는 그 흔한 로맨스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영업사원 코이즈미 준이 주인공인 고구마(새끼곰)ㅎㅎㅎ를 좋아하는 듯한 표정을 몇 번 드러내지만 조금도 그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만화 잡지의 편집자들과 마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인쇄업 종사자들에 대한 대단히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정해진 분량 안에 로맨스를 넣을 마음은 애당초 없었던 것 같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단순히 편집자들이 폼잡고 일하는 모습을 담는 것이 아니라,

마감과 사투를 벌이다시피하는 작가들과의 끈끈한 관계(비록 그것이 이상적이라 할 지라도),

결국 어시스트로 시간을 보내다가 등단을 포기하는 작가,

발간된 책을 판매하는 영업 사원들의 속사정,

발간 부수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편집부와 영업부,

늦어지는 마감을 위해 자리를 지키는 인쇄업체 직원들,

끝내 소진되지 못하고 재고로 남아버린 책들을 모두 파쇄하는 모습까지 다 보여준다.

한가지 더 얘기하자면,

차근차근 단단하게 지어 올린, 상당히 설득력 있는 드라마의 힘 역시 이 드라마의 매력.

드라마 4화부터 차근차근 진행되는 신인작가 나카타의 성장 과정은 통속적이지만 매우 인상적이다.

천재적인 재능은 있으나 세상과의 소통에 서툴러 내면의 껍데기를 부수고 나와야만 하는 신인작가 나카타와 국가대표 후보 출신의 촉망받는 유도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은퇴하고 주간 바이브스에 입사한 신입 사원 고구마(ㅎㅎㅎ)의 동반 성장기는 다분히 예측 가능하고 통속적이지만 그게 뭐 어때서?라고 말할 정도로 드라마적 한 방이 있다.

그냥 개인적으론 이런 이유로 다시 정주행했음에도 이 드라마가 즐거웠다.

우리네 드라마도 정말 재밌고 인상깊은 드라마들이 많이 나오지만('스카이캐슬'같은),

가끔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진짜 일하는 모습이 현실적으로 담긴 드라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그러니까...

코미디의 외피를 쓰고 연애가 나오긴 하지만 여전히 전문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레 풀어놓는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같은 드라마.

아니면,

이시이 유야의 <행복한 사전 舟を編む 원제: 배를 엮다>같은 영화...같은.

+

일본의 출판 시장과 우리 출판 시장의 규모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다르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도 잡지 판매부수, 단행본 판매 부수가 해가 갈수록 저하되어 사기가 떨어져있는 분위기라고 계속 얘기하지만...

그럼에도 기대되는 신인작가의 첫번째 단행본 1권의 초판이 3만부라니...

초판 2~3,000부 증쇄 1,000~2,000부의 우리네 현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OECD 국가 중 가장 독서량이 적은 나라가 우리나라라는데 독립서점의 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그 속내는 차치하고),

출간을 원하는 이들도 정말 많고...

이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