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크리스말로윈] (2014)
에픽하이 [신발장]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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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며칠 서태지 신보 <크리스말로윈>와 에픽하이(Epik High)의 <신발장> 음반을 들었다.
에픽하이 신보는...
처음에 들었을 때 확실히 '괜찮게' 들렸다.
세련된 느낌도 있었고 여러 뮤지션들을 불러모아 피처링했던데 각 뮤지션의 개성도 잘 살아난 것 같고.
물론... 투컷츠의 편곡에는 baths등의 레퍼런스들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튼 딴지 걸 정도는 절대 아니어서 즐겁게 들었다.
(다만, 가사는 공감할 수가 없었고)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너무 쉽게 질리더라.
이틀을 듣는데 이틀째 내가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곡은 태양 피처링의 'Rich'란 곡 뿐이니.
서태지의 신보는 여전하다.
몇년만에 들고 온 음반의 트랙리스트가 앙상하다는 것도, 플레잉 타임이 짧다는 것도 여전하다.
심지어 공연도 길지 않았단다.ㅎ
이건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늘 한결같았던 문제이니 이걸 갖고 뭐라 왈가왈부한다는게 무의미할 듯.
'소격동'을 듣고 요즘 서태지가 인디트로닉 계열의 음악을 많이 듣나보다 싶었는데 음반 전체를 듣고보니 그러한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더라.
음반에 수록된 곡 중 선공개된 '소격동'과 '크리스말로윈'보다 유난히 다른 세곡을 자꾸 듣게 되는데 그 세곡은 '숲속의 파이터', '90s ICON', '비록(悲錄)'.
'숲속의 파이터'는 70년대 말에 한장의 음반을 발표하고 사라진 호주 듀오 Madden and Harris의 음반 정서가 연상될만큼 묘하게 몽롱하면서도 우울한 정서가 있다.
솔직한 심정이 덤덤하게 울리는 '90s ICON', 격동 속에서 빠져나와 세상을 보는 달라진 심정마저 느끼게 하는 '비록(悲錄)' 이 세곡은 자꾸만 듣게되는 매력이 있다.
서태지가 이번 신보는 기본적으로 밝은 느낌의 대중적인 곡들로 채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의 신보는 여태까지의 그의 음반 중 가장 개인적인 동시에 가장 비대중적이다.
다양한 일렉트로닉 장르의 요소들이 혼재되어있는 그의 음반은
기본적으로 해외 인디트로닉 뮤지션들의 음반과 비슷한 감수성을 전달해준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장르는 결코 국내에 익숙한 장르가 아니다.
(인디트로닉의 감성을 끌어안으면서도 음악의 외향은 종종 팽창주의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확실히 서태지의 음악은 묘한 구석이 있다)
게다가 누가 서태지가 아니랄까봐 내가 언급한 가장 내밀한 느낌의 세곡도 편곡에는 일말의 여유가 없다.
뭔가 조금이라도 도화지에 여백을 남기면 불안해하는 강박증같이 그의 곡에는 쉬어가는 여백이 없다.
겹겹이 이뤄진 편곡의 레이어가 지나치게 촘촘하게 이루어져 듣다보면 안타까움마저 생길 정도의 음악적 강박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뭔가 내려놓으려고 해도 내려놓지 못하는 서태지라는 뮤지션을 가장 잘 드러낸 음반이 이번 음반이라는 생각도 드는거지.
하지만 이전 음반에서부터 엿보이기 시작한, 그가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이번 음반을 통해 대단히 극대화된 듯 하고
그 지향점은 많은 이들이 기대한 거대한 스케일의 음악이 아니라 내밀한 이야기에 집중한 개인적인 곡들이라는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그가 대중과 소통하는데 얼핏 실패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은 오히려 조금 더 작은 무대를 통해 대중과 소통해야하는데 지나치게 큰 무대에서 선보이려고 한 것은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 남는다.
그럼에도 난 이 음반을 실패작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전에도 말했듯 여전히 서태지의 음반은 내게 계륵과도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히 기대하게 하지만 결코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도 동시에 확신하는 그런 음반들이니.
하지만 이번 음반에는 내가 여러번 플레이를 누르고 집중하게 하는 곡들이 분명히 있었다.
비단 그 곡들이 결코 새로운 음악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곡들이 해외의 몇몇 뮤지션들을 떠오르게 할만큼 음악적 유사성이 느껴진다고 해도
(표절이라는 말이 절대...절대 아니다) 이제 40줄에 들어서 세상을 바라보고 대중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뮤지션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