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롤랜드 에머리히 (Roland Emmerich)
2009
John Cusack, Amanda Peet, Chiwetel Ejiofor, Thandie Newton, Woody Harrelson, Danny Glover

이 영화는 주는 것 없이 싫었다. 영화가 밉다기보단 국내 영화 유통구조를 장악하고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이 재수없어야

 

하지만 말이지. 그래서 보지 않으려다가 예고편에 가볍게 낚여서 극장을 찾았다. 그것도 식구들 다같이 관교동 유로클래스를.

다른 말이 필요없다.
러닝타임 내내 지나치리만치 현실적이어서 그 공포감이 상당했지만 그것도 계속되니 나중엔 시들시들...
헐리웃 블럭버스터가 보여줄 수 있는 가공할 돈ㅈㄹ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헐리웃 재난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요소가 깡그리 등장한다. 이혼한 가정, 자녀와의 갈등->끈끈한 관계로의 발전, 화산폭발, 거대해일, 음모론 등등.
그래봐야 텍스트는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건 영화 속 캐릭터들의 짜증스러움이다.
쏟아지는 화산파편 불덩이가 기가막히게 설득력없을 정도로 주인공을 피해가고, 캐릭터들의 비행솜씨와 운전
솜씨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를 완전 우습게 여길 정도로 놀라울 지경이다.
사실 서스펜스라는 건 상황이 캐릭터를 기다리는게 아니라, 캐릭터가 상황을 극복하는 것에서 유발되는 것인데
이 영화에선 대재난이 주인공의 길을 미리 터놓고 기다리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게다가 당장 바로 눈 앞의 땅이 꺼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캐릭터들은 멈춤상태로 유머스러운 대사를 내뱉는
것도 당혹스러울 뿐이다. 도대체 누가 눈 앞의 산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도 '정말 안가실겁니까?'란 대사를
느릿느릿 읊을 수 있냔 말이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가 다 그렇지 뭐...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건 좀 심하잖아' 싶은 장면이 어디 한 둘이 아니다.
시간떼우기용으론 무리가 없을 수 있으나 보는 내내 '이래도 놀라지 않을래?'라고 묻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하고,
게다가 사상 최강의 또라이들인 미국 대통령과 이태리 대통령만이 국민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려는 장엄한
짓을 해대는 걸 보면, 역시나 롤랜드 에머리히의 정치성에 신물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덩달아 억울한 것은, 이것보다도 훨씬 훌륭했고 멸망에 이르는 소시민의 심리와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던 알렉스 프로야스의 수작, 하지만 그냥 땅바닥에 묻혀버렸던 영화 [Knowing/노잉]의 존재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그저 때려 부시는 [2012]보다 진정성을 갖고 그럴싸한 세계를 만들었던 [Knowing]이
훨씬... 훠얼~씬 멋진 작품 아니었나?

 

 

 

 

 

 

[the Hangover/행오버]
토드 필립스 (Todd Phillips)
2009
Bradley Cooper, Ed Helms, Zach Galifianakis, Justin Bartha, Heather Graham, Sasha Barrese

결혼을 앞둔 남자들의 '총각파티'는 어찌보면 익살스러울 수도 있으나 그 내면엔 좀 씁쓸한 여운이 있다.
이제 '넌 결혼할테니 다른 여자와의 섹스는 꿈도 못꾸지. 그러니 마지막 날을 기념하며 즐기는거야'라는.
어이없게도 가족 제도에 구속당할 예정이면서 그 서글픈 끝을 예단하고 마지막을 여성들의 살을 부비며 즐기자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묘하게도 즐겁지만은 않지 않나.
하지만, 그건 다 핑계지. 어차피 결혼한 부부의 70%가 이혼하고, 유부남, 유부녀의 혼외정사가 80%(남자는 90%)
가 넘는 지경인 미국에서의 '총각파티'란 그냥 그 핑계로 실컷 부비부비(그루빙)하자는 것 외엔 없는 것 같다.
자... 그렇다면 총각파티의 끝은 어디인가?라고 누군가 의아해한다면 그 사람에겐 이 영화를 권한다.ㅎㅎㅎ
사실 영화의 내용이야 결혼을 앞둔 덕이 친구들과 라스 베가스에 가서 총각파티를 진탕 벌이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장으로 오면서

벌어지는 일들로 별 다를 것이 없지만, 이 영화는 주변에서 흔히 사람들이 '나 어제 완전 필름 끊겼어'라고 말하면서 '내가 어제 그랬어?'라고

난감해하며 묻는 이들에게서 힌트를 얻은 영화의 진행방식이 아주 인상적이고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도를 높여준다.
그러니까 이들은 총각 딱지를 떼고 가정이라는 암흑으로 빠져드는 '덕'을 위해 라스베가스 시저 호텔 옥상에서
술잔을 마주치지만 다음 장면이 바로 엉망진창이 된 호텔방에서 각양각색으로 쓰러져 있는 이들의 모습으로 넘어 가버린다.
관객들은 당연히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라고 궁금해하지만 관객이 궁금한 만큼 이 영화속 덤앤 더머들도
완벽하게 필름이 끊겨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모른다. 게다가 결혼을 앞둔 친구 덕은 사라져 보이지도 않고 말이지.
자신들의 '끊겨버린 필름'을 복원하고자 이 덤앤 더머들은 단서를 찾아 나간다.
그 와중에 속박하는 애인에게 말없이 따르던 스튜나, 교사지만 애들 코묻은 돈이나 꼬불치던 선생같지 않던 선생필이 개그스러운 자각을 하는 경험이나,

덕의 처남이 될 처지지만 사실상 대책없는 앨런의 좌충우돌이 기가막히게 벌어진다. 그렇다고 교훈적인 뭔가를 기대하지 마시길.
이들은 마지막까지 다 자란 애들일 뿐.
인생살아가면서 나이먹고 근엄해지고 보수적이 되는 어찌보면 많은 이들이 당연시하는 과정에 묘하게도 반기를 드는 영화.
정말로 재밌게 본 영화.

 

 

 

 

 

 

 [(500) Days of Summer/500일의 섬머]
마크 웹 (Marc Webb)
2009
Joseph Gordon-Levitt, Zooey Deschanel, Geoffrey Arend

근래 본 로맨스 중에선 [Two Lovers]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영화.
기본적으로 조셉 고든 레빗의 팬이긴 하지만 그가 이런 로맨스에 어울릴까 싶었는데 의외로 상당히 잘 들어맞더라.
사실 여기서 조셉 고든 레빗이 연기한 '탐'이 그의 마이너리즘과 잘 맞아 떨어진다고 해야할까?
게다가 은근히 팬을 보유한 패셔니스타로도 잘 알려진 쥬이 디샤넬이 문제의 '섬머' 역으로 나온다.
로맨스 영화라고 말했지만, 이 영화 서두에 너레이션으로 밝히듯 이건 로맨스 영화라기보다 탐의 성장 영화에 가깝다.
섬머라는 여성에게 사랑에 빠진 탐이 그녀와 함께 보낸 500일을 단순한 시퀀스로 보여주기 보다는 재기발랄한
편집으로 엮어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흔하긴 하지만 주인공 탐의 심리를 더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인생에 몇 번은 겪을 사랑.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소통인지, 아니면 내가 더 많은 그릇을 채우고 상대에게 그만한 애정을 기대하고 있는게 아닌지에 대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본 적이 있을텐데, 이 영화는 그러한 감정을 진솔하고 설득력있게, 그러면서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진지한 만남은 싫다면서 선을 그은 섬머가 남자의 입장에선 얄밉기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나 역시 탐과 똑같이
스스로 기대를 채우고 그만한 애정과 관심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멋지지 않나.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것의 결과와 관계없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그만큼 더해지고,
그만한 경험을 체험한다면 시간이 지난 후 그런 열병은 아름다운 추억처럼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니까.
나이 40.
난 이제 더이상 이런 사랑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랬던 시간들을 반추하면서, 숨기고 부끄럽기만 했던 나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도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것으로 충분히 매력적인게 아닌가.
올 최고의 영화 중 하나.

*
영화만큼이나 내 귀를 울려주던 멋진 OST도 압권이다.
대부분 7~80년대의 인디록들로 채워져있는데, the Smiths, Pixies, the Clash는 물론이고 내가 좋아했던 팝듀오
Hall & Oates, 그리고 Regina Spektor, Paul Simon등의 곡들도 줄줄이 들려와 가슴을 콩닥거리게 만든다.

 

 

 

 

 

[9]
쉐인 애커 (Shane Acker)
2009
Voicing dubbed

오토모 가츠히로의 [스팀보이](2003)에는 현재의 과학력으로도 실현하기 힘든 과학력을 19세기 중반의 시기를
배경으로 시침 뚝떼고 보여준다.
그러한 비과학적인 과학의 진일보의 근간엔 늘 '초물질'이나 마법같은 비현실적인 매개가 사용되곤 하는데 쉐인
애커 감독의 첫 장편인 [9] 역시 그러하다고 봐야겠다.
위에서 [2012]를 다루면서 말한 바 있듯이 이 영화는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Matrix/매트릭스]의
외전격인 [Animatrix/애니매트릭스]에서 보여줬던 것과 거의 비슷한 기계와 인간의 치열한 전쟁. 기껏해야 근대정도로
보이는 시대에서 인간들은 완벽한 인공두뇌를 탄생시켰다는 점을 보면 이 영화는 종말론과 스팀펑크의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싸이버펑크의 요소는 이 영화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대상과 배경은 이러한 두개의
커다란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종말을 고한 시간, 세상에 남아 있게 된 넝마로 만든 인형같은, 단지 생명을 갖고 있는 정체 불명의 캐릭터들.
1~9까지 등 뒤에 적은 채 존재하게 된 이들이 세상의 희망을 향해 활극을 펼치는 것인데, 좋게봐도 내용을 곱씹을
여지는 그닥 없다.
하지만 난 그게 그닥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팀 버튼의 흔적이 보이는 애니메이션의 느낌에 놀라운 비주얼을
독창적으로 창출해내는 보기좋은 화면 때문일까? 게다가 음울하고 기괴한 세계관의 매력이라는 것도 빼놓을 순
없고 말이다.
다른 걸 떠나서 전혀 지루함이 없는 영화라는 점도 중요하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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