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나는 대로 마구 휘갈겨 써놓고는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올리는 바람에... 문맥의 흐름이 완전히 엉망. 조만간 수정할 것임.-_-;;;

새벽에서야 써놓은 글 읽어보고 민망해서 혼났다. *


무한경쟁, 그 속에서 피폐해가는 대중들의 삶,
그리고 가치의 다원성이 소멸해가는 자본주의를 다시한번 곱씹게하는 2000년대 몇편의 영화들을 생각나는 대로 추천.
영화적 재미 역시 보증할 수 있는 영화들.
다 우울한 영화들만은 아님.

 

 

 

 

[Le Silence de Lorna/로나의 침묵] directed by Jean-Pierre Dardenne, Luc Dardenne

자본주의가 마치 민주주의인양 오도된 현실에서,

수없이 반복된 기득권의 프로파겐다로 인하여 이젠 세계 곳곳에서 유구한 인본주의가 자본주의의 탐욕에 흔들리는 현실이 일상이 되었다.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 역시 천박한 자본주의에 더럽혀진 대중의 피폐한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알바니아에서 벨기에의 국적을 획득하려고 위장결혼을 한 뒤 손쉽게 이혼하기 위해 그 상대로 약쟁이를 고른 로나가

오히려 연민에 빠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 조용하고 묵직한 암담함.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키지 못했을 때 손에 쥔 경제적 안정은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한다는,

지극히 교훈적이지만 뼈에 사무칠 정도로 강렬한 이 메시지가 진심어린 생명력으로 메시지를 전해준다.
자본에 대한 양심의 침묵, 그 침묵과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와 로나가 비로소 침묵을 깨려는 그 순간, 이 영화는 일말의 동정도 없이
로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렇게 침묵하거나, 침묵을 깨려는 이들에게 다가온 암울한 결말이 바로 현실이라고 다르덴 형제는 얘기한다.
다르덴 형제 특유의 롱테이크가 전혀 지루하지 않고 끝까지 몰입하게 되었던 영화.

 

 

 

 

 

 

 

[Wendy and Lucy/웬디와 루시] (2008) directed by Kelly Reichardt

신자유주의... 말이야 그럴싸하다.
하이에크나 밀턴 프리드먼같은 자들이 떠들어댄 저 보수 이데올로기를 고착화시키기위한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개념은 무한경쟁에서 낙오되는 대다수를

조금도 떠받쳐줄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걸 민영화하여 이윤을 극대화 한답시고 인력을 줄이고 장비의 노후화를 눈감고...

그러다가 결국 카트리나 태풍이 왔을 때 FEMA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잖나. 볼리비아의 엄청난 수도요금 급등도 다 그 민영화때문이었고,
미국의 정전사태도 역시 민영화로 인한 이윤추구의 마인드에서 나온 인재들이었다.
켈리 라이하르트의 이 영화 [wendy and lucy/웬디와 루시]는 영화 러닝타임 80분동안 단 한번도 신자유주의니 뭐니하며

고리타분한 정치적, 경제적, 철학적 이야기를 조금도 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회 피라미드의 가장 밑을 차지하는 빈민 중 한 명인 웬디라는 여성의 며칠간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보며 황폐화되고 삭막해진 미국의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이란 허울좋은 구실로 '평평하지 않은 싸움터'로 사람들을 무장해제시켜 내몰아댄다.
그리고 국가가 담당해야할 공적투자를 국민 개개인에게 하나둘 떠넘긴다. 미국의 예처럼 어디에서나 교육 재정을 먼저 줄이고,

서민 복지 예산을 대폭 축소하거나 없애버린다다. 이건 신자유주의를 맹신하는 어느 국가에서나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영화 [웬디와 루시]에서 웬디는 단 한마디의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지만,

그건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 이데올로기에 처절하게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끝까지 보는 이를 암담하게 만든다. 시스템을 통해 양산된 '패배자'들이,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탓하며 체제에 저항할 엄두조차 못내고

무너지는 저들만의 세상. 자신이 가진 최소한의 것마저 뺏겨버리는 웬디의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답답함의 끝을 보게 된다.

이 영화의 감독 켈리 라이하르트가 이번에 제시 아이젠버그, 다코타 패닝등을 기용하여 급진적인 환경 행동주의자들에 대한 영화를 찍었다.

영화 제목은 <Night Moves/나이트 무브>

 

 

 

 

 

 

 

 

[Io Sono L'Amore / 아이 앰 러브] (2010) directed by Luca Guadagnino

루카 과다니노의 이 걸작은 자본에 의해 정의되는 인간과 관계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 메시지다.
그 저항의 메시지는 우리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익혀온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그닥 멀리 벗어나지 않지만

놀랍도록 솔직한 영화적 미덕을 통해 관객에게 뜨거운 기운을 전해주는데 성공한다.
주인공 엠마를 끝없이 프레임에 가두던 카메라가 마침내 그녀를 해방하고 프레임에서 사라지게 하는 순간의 그 격정의 감정은
격하게 타오르는 에크하르트와 쿼키의 음악과 함께 절정에 오르고 잊혀지지 않는다.
엠마의 정사씬은 아마도 시각적인 장치로 촉각의 이미지를 살려낸,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아닐까 싶다.

 

 

 

 

 

 

[Julia] directed by Erick Zonca

인생의 막장에 선 알콜 중독자인 Julia(Tilda Swinton).
술을 마시고 아무하고나 섹스를 하며, 직장에서도 쫓겨난 막막한 주인공. 알콜중독 치료 모임에 나갔다가 엘레나라는 여성이 자신의 아들을

세계적 거부인 할아버지가 데려가버렸다며 다시 되찾아오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해오자 솔깃하여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지만 일이 겉잡을 수 없이 꼬여버리는 이야기.
주로 곧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준 Tilda Swinton이 짙은 화장과 음모 노출까지 하는 파격을 보여준 이 영화는 '강인한 모성애'라는 관점에서 보면

John Cassavetes 감독의 [Gloria]와 상당히 유사한 느낌도 있다. 다만, 이 영화는 [Gloria/글로리아]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조리한 체제의 모순이

영화 전반을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감을 보인다. 
미국에서도 구제받지 못하고, 멕시코 국경을 건너서도 암담한 현실에 직면해야하는 줄리아의 처지는 빈곤의 나락에서 실업과 빚으로 압박받는

현재 미국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고, 처절하리만치 피폐해진 미국과의 국경에 인접한 멕시코 도시 티와나의 모습들은

NAFTA가 만든 병든 괴물같이 처연한 몰골의 현재의 멕시코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참... 남의 나라 얘기같지만은 않아서 보는 내낸 답답하더라.
여성의 강하고 위대한 모성 본능이 발휘되는 후반부는 시종일관 막강한 텐션으로 보는 이를 피말리게 함.
러닝타임이 138분으로 제법 길지만 전혀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는 영화.
강추.

 

 

 

 

 

 

 

[Gomorra/고모라](2008) directed by Matteo Garrone

이 영화는 [City of God]을 연상시킨다.
베를루스코니 집권 이후 완전히 망가져버리는 이태리의 남부 나폴리를 아주 피폐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곳엔 이탈리아가 과거에 반추했던 네오 리얼리즘의 노스탤지어식 추억은 온데간데 없다.
그저 하루가 멀다하고 죽어나가는 사람들과 그 공포 속에 만성이 되어 자신이 살기 위해 어릴 때부터 총을 잡고 트리거를 당기는 군상들만 넘칠 뿐.
남부 나폴리에서 이렇듯 활개치는 카모라(Camorra)라는 갱집단 때문에 서민과 농민들이 완전히 붕괴된 모습을 아주 차갑고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카모라...라는 갱집단은 정부가 기능하지 못하는 이탈리아의 부폐한 현실이 어떻게 일반인들의 삶을 절망적이고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제목이 성서에 등장하는 '고모라'. 신이 포기한 도시 '고모라'. 그리고 그 어감은 갱조직 '카모라'와도 유사하다.
바로 이런게 이탈리아적 악몽이라는 것.
신자유주의와 경제권역통일등... 그 끝의 말로에서 서민과 농민들이 겪을 피폐한 말로를 이 영화는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는

남미나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게 아니라... 우리가 선진국으로 '알고'있는 남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


 

 

 

 

 

[Efter Brylluppet/After the Wedding](2007) directed by Susanne Bier(수잔 비에르)

Mads Mikkelsen(매즈 미켈젠)의 연기는 이미 [Adams æbler]에서 절절하게 경험한 바 있지만 이 영화에서도 그야말로 '정중동'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영화의 말미에서 야콥(매즈 미켈젠)의 결심에 따라 물질적인 풍요를 입게되는 봄베이의 그 아이들이 정말로 행복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야콥이 그 아이들에게 말했던 대로

바보들이 가득한 부자 흉내내기, 바로 그 시작점이며 선의를 가장한 식민자본주의의 다른 한 형태일 뿐인지 진중하게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넘어서 이 영화는 생의 마감을 앞두고 자신의 가족을 배려하는 이의 절절한 감성을 그려내고 있고,

그의 가족애에는 일말의 이데올로기따윈 개입하지 않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the Visitor/비지터](2007) directed by Thomas McCarthy

[the Station Agent]로 아주 인상깊었던 Thomas McCarthy(토마스 맥카시)감독의 07년작.
서로 상처받고 닫았던 마음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지나친 기대가 다시 상처받고 이를 치유하는 과정을 건조하게 그려낸 토마스 맥카시.
이번엔 911 이후 더욱 삭막해지기만 하고, 테러에 대한 보호라며 오히려 수많은 인권 유린과 위선과 권위로 똘똘 뭉쳐 일그러져가는 미국의 모습을

월터 베일(리차드 젠킨스) 교수에게 일어나는 해프닝을 통해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이 한없이 긴 여운을 남겨주는 영화.

 

 

 

 

 

 

[Sommer '04/서머 04](2006) directed by Stefan Krohmer

이 영화는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여성 둘의 팽팽한 경계 심리가 주요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까놓고 보면 사실 아슬아슬한 가족 관계가 '모럴'이라는 도덕율에서 일탈하여 붕괴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영화 속 여주인공의 겉잡을 수 없는 성적 욕망은 그 남편과 가족을 풍비박산내지만, 가족제도에 얽메인 그들도 이러한 부담을 벗어던지게 되면

오히려 모두가 자유로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한 영화. 

 

 

 

 

 

 

 

[松ヶ根乱射事件/마츠가네 난사사건] (2006) directed by 야마시타 노부히로

씁쓸하지만 뒤를 탁... 치는 듯한 코미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평범한 일상의 모습에 숨막힐 듯한, 하지만 은근한 텐션이 내재되어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텐션의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노심초사의 마음으로 보게 되는 영화.
일상을 천천히 응시하는 프레임을 나열하면서도 이렇게 지루하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눈 한번 못돌리게 만들다니 놀라울 뿐.
영화속 파출소를 마주보는 샷에선 자꾸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가 떠올라 아주 극도로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버블경제 붕괴 이후의 일본을 그리고 있지만,

그러한 시대적 상실감과는 별개로 인간의 어두운 본연의 내면과 사회적 윤리가 강압하는 개인의 불가항력적인 정신분열적 상황을 별 것 아니라는 듯 표현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 강박과 잃어버린 허무, 이기적 본능을 도덕적 해이로 가장한 묘한 에로티시즘으로 얄궃게 표현하고 있다.

Pascals의 음악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마츠가네의 스산하고 차디찬 공기의 대기를 쓸쓸하게 부유하는 듯한 Pascals의 음악은 너무나 잘 어울린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어어부(백현진)가 들려줬던 단 한곡의 느낌만큼 강렬했던 기억.



 

 

 

[Kynodontas/송곳니](2009) directed by Giorgos Lanthimos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정은 단순히 작은 울타리일 뿐인데 이걸 '1984'버전으로 확장하면 상당히 더... 섬뜩해진다.
온갖 가증스러운 작태로 언론을 통제하고 그릇된 정보를 양산하는 지금의 한국을 생각하면 더더욱 섬뜩해지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당연히 알아야할 사안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고,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개개인의 노력이 필요하거나, 혹은 그릇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남발하여 사안에 대해 정확한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면, 그 시점이야말로 모두가 바보가 되는 섬뜩한 세상 그 자체가 아닐까.
사안에 대한 정확한 원인과 결과를 도출할 생각은 안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따져가며 결과를 왜곡하는 황당한 상황을 우린 요즘 거의 매일 목도하고 있지 있으니까.
이 영화 [송곳니]는 섬뜩하게 다가오지만 눈을 돌려서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한국으로 오면 더 거대한 빅브라더'스'의 존재에 치가 떨리게 된다.
마치 '빅브라더'와 같은 모습으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
[송곳니]에서의 부모는 아이들의 유일한 관심을 가족에서의 화목과 부모로부터 칭찬받는 것으로 대체시킨다.
덕분에 아이들은 화목한 가정, 칭찬받는 자식들이란 다루기 좋은 타이틀로 길들여져 있다. 그러니 이들이 무료할 리도 없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누구나 그렇게 지내야하는 것으로 알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화목한 중산층 가족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힘을 가진 자에 의해 이용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하는거지.
이게 비단 이 영화 속 기이한 가정만의 이야기일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송곳니]의 결말은 어떻게 보는 이에게 열려있지만, 결말과 관계없이 영원히 통제하고 종속시킬 수 없는 인간의 본성, 호기심의 관성을 얘기한다. 이미 통제와 세뇌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메시지를 우린 수많은 영화에서 확인해왔으니까.

 

 

 

 

 

 

 

 

[Fish Tank/피쉬탱크](2009) directed by Andrea Arnold

[Wendy and Lucy/웬디 앤 루시]에서 우린 아무 것도 가진 것없이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디스토피아를 향해

정처없이 눈동자의 촛점을 잃은채 내몰리는 주인공을 바라본 바 있다.
많은 이들이 우리 삶의 대부분은 정치와 상관없다고 믿곤 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쿨한 모습이라고 믿는 이들마저 있다.

저 개같은 정치인들로부터 신경만 끄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들의 행위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실제 삶에, 그것도 끼니를 떼우는 일에 엄청나게 관련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와 내 자식이 미래에 걸 수 있는 희망의 동앗줄도 그들의 행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사실도 안다.
[피쉬탱크]는 댄서를 꿈꾸는 거칠지만 오히려 순수한 미아(케이티 자비스)의 며칠간의 좌충우돌을 묵묵하게 따라간다.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 보내야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한 번 춤을 추는 것 뿐.

마지막 미아의 모습은 아주 깊은 여운을 남긴다.

 

 

 

 

 

 

 

 

[Another Year / 세상의 모든 계절](2010) directed by Mike Leigh

 

궁금했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톰과 제리 부부에 자신을 이입시킬까? 메리에게 감정이입될까?
공손하고 성실한 아들과 함께 서로를 돈독히 여기며 주말농장에서 흐르는 시간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상적인 톰과 제리 부부.
그 누구하나 곁에 없이 외롭고 쓸쓸하지만 작게 남겨진 자존심마저 외로움에 버거워 던져버리는 메리.
톰과 제리 부부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지만 자신들의 행복을 위협하거나 방해하는 대상에 대해선 가차없이 매몰찬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런들 누가 톰과 제리 부부를 탓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여전히 타인에 대해 관대하고 이웃이나 친척을 위해 솔선수범하니 말이지.
문제는 메리가 다시 톰과 제리 부부에게 다가섰을 때의 관계다. 더이상 동등할 수 없는 친구가 아니라 거두어주고, 머리를 숙여 들어가버리는. 그런 식의 관계.
마지막 식사 모습에서 초라하게 고정되어 머무는 메리에 대한 카메라의 시선은 섬뜩하면서도 불편하다.
톰과 제리 부부의 시선에서 나와 비슷한 시선을 느꼈고, 동시에 메리를 통해 사회적 스탠다드에 대한 불편함도 느꼈으니.

 

 

 

 

 

 

 

[Le Havre / 르 아브르](2011) directed by Aki Kaurismäki


늘 소외된 계급에 대해 이야기해온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작품 중 가장 유쾌한 작품 중 하나.
그리고 [성냥공장 소녀]의 희망없는 현실에 대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식 판타지.
그의 페르소나 캐티 우티넨(Kati Outinen)을 여전히 볼 수 있었고,

르 아브르를 배경으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를 인간적인 정으로 보듬아 안아주는 유례없이 넘치는 따뜻함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그 끝은 당연히 기적이고.
아키의 이 이야기가 탐욕의 자본주의가 이성과 지성을 삼켜버린 지금, 희망을 주는 것일까? 아님 그저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일까.


 

 

 

 

 

[Le Gamin Au Vélo / 자전거 탄 소년] directed by Jean Pierre Dardenne, Luc Dardenne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놀랍지만 선뜻 보게 되진 않는다.
터질듯한 감정을 억누르고 대상을 꼼꼼하게 따라가는 카메라는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나 커다란 밀려오는 격정의 감정을 느끼게 하니까.
aipharos님은 영화 시작부터 눈물을 흘렸고, 끝나고 난 뒤에도 감정 절제가 안되는 것 같았다. 민성이도 나도 다같이 힘들었다.
시릴의 이야기 속에 자본주의가 맞닥뜨린 부조리가 그대로 드러나고, 이 부조리를 덮고 빈곤과 방황의 굴레를 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믿음의 사랑이다.
고작 87분 러닝타임을 쫓는 내 심정은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다르덴 영화 중 희망적인 영화.
힘들다. 내가 내 주변에서 보면서도 관심을 거두는 수많은 불편한 진실을 이 영화는 얘기한다.
이 영화를 보면 비토리아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무산일기 / the Journal of Musan](2010) directed by 박정범
박정범 감독의 놀라운 걸작.
탈북자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중산층이 붕괴되어 빈민층으로 유입되고

결국 사회적 계급 이동이 차단되어가는 한국의 썩은 자본주의를 이토록 여실히 진정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얼마나 되었나 싶다.
극 전체를 지배하는 절망의 에너지란거. 이 영화를 통해 뼈저리게 느낀다.
승철 자신의 분신, 아니 아바타인 백구의 모습을 통해 은유적이지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게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도덕률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씁쓸한 메시지가 가슴을 울린다.

 

 

 

 

 

 

 

[Barbara/바바라](2012) directed by Christian Petzold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2012년작 [바바라]는 영화가 가진 주제의식이나 사유의 깊이보다는 드라마적인 힘이 훨씬 중시되는 영화다.
사실상 일정 지역에서 연금상태이고, 수시로 집안을 비밀경찰에게 다 수색당하는 수모를 겪지만, 그녀에겐 사랑하는 이가 있고,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사랑이 다가오며, 그녀가 눈을 뜬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할 대상들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감독이 얘기하는 '바바라'는 우리가 당연히 가져야할 인본주의적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존재로서의 상징이다.
그녀가 그녀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던 것처럼.

 

 

 

 

 

 

 

 

[Tyrannosaur/디어 한나](2011) directed by Paddy Considine

자책, 원망, 외로움에 대한 공포와 아픔이 서로를 보듬아 안으면서 치유되는 과정을 그야말로 '아프게' 보여준다.
배우 패디 콘시딘의 장편 데뷔작.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예외없이 휩쓸고간 영국의 황폐함을 똑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영화.
물론... [Harry Brown/해리 브라운]만큼 적나라하진 못하지만.

 

 

 

 

 

 

 

 

[Safety Not Guaranteed/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2012) directed by Colin Trevorrow

세상의 정해진 기준에서 결코 중심부에 설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 그리고 그 주변부에도 제대로 발을 딛고 살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찬가와도 같은 이야기.
감독은 세상의 일반적인 기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지나치게 희화화하여 현실감을 무너뜨려버리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견지한다.
사실 이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없겠지.
그들은 이 척박한 세상에서 결코 공존하며 살아나갈 수 없다는 얘기가 되니까.

 

 

 

 

 

 

 

[Revanche/보복](2008) directed by Götz Spielmann

유럽의 영화들은 헐리웃 영화들보다 호흡이 길다.
배역의 심리적 교감을 요란하지 않게 바라보고 밀착하여 따라다닌다.
그덕에 영화는 늘 사유의 여지를 관객에게 제공하며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편이지. 
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관계라는 것은 잔인하리만치 얄궃기도 하다는 걸 소스라치게 느낄 수 있다.
사건의 모든 것을 지켜보는 감상자의 전지적 입장이라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토록 괴로운 것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허무한 죽음, 예정된 죽음, 그리고 엇갈린 관계, 인간의 죄의식,

그리고 보복과 용서의 기로에 선 주인공의 모습들을 절제된 구조 안에 이토록 잘 쌓아올린 축조물을 보는 일이란 그리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의 심리와 죄의식에 대해 매우 밀도있는 시선을 드러내보이는 영화이면서 스릴러의 구조를 통해 영화적 재미까지 획득한, 보기 드문 영화 중 하나.

 

 

 

 

 

 

 

[Vozvrashcheniye/the Return/리턴](2003) directed by Andrei Zvyagintsev

2003년에 발표된 영화지만 뒤늦게 DVD를 구입, aipharos님과 보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꼼짝하지 못했던 러시아 영화.
위대한 영화 전통을 가진 러시아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영화.
그에 앞서 소통과 화해가 불가능한 이들의 비극을 진중한 표현력으로 보여준다.
어찌보면 페레스트로이카와의 서글픈 작별을 고하는 러시아의 불안정한 시대 모습을 은유한 것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고.


 

 

 

 

 

 

[Filantropica/박애] (2002) directed by Nae Caranfil

언제나 변방에 있던 루마니아 영화지만 [4개월, 3주...]나 감독이 요절한 [California Dreaming]같은 걸작이 공개되는 걸 보면

동구 영화의 저력은 문화적 보고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코미디의 외피를 쓴 지독하게 처절한 생존 이야기인 이 영화는 언더텍스트가 너무 많아 오히려 영화적 주제를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설파하는 거짓 유토피아에 얼마나 인간이 농락당할 수 있는지 끝장나게 보여주는 영화.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도 높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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