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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대회를 위해 장장 일주일을 지방에 내려갔다가 어제 저녁 올라왔다.
사실... 아들은 이번 대회에 내심 욕심을 냈었다.
거의 매일 실전과 동일하게 진행된 연습에서 아들의 기록은 10m 공기권총 부문도 8인이 벌이는 결선 진출이 가능한 정도의 성적이 꾸준하게 나왔고,
고등학교 들어와 처음 쏴본 25m 화약권총 부문은 놀랍게도... 첫대회를 앞두고 이미 전국 3위권 정도의 성적이 나왔다.
당연히 아들은 스스로의 성장에 상기되었고 은연 중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나와 와이프는 아들에게 그날그날의 성적에 연연하지 말라고 말하고, 과도한 칭찬같은건 아예 하지 않았다.
코치선생님 역시 아들의 기분이 너무 들떠있으니까 이를 자제시키려고 애도 쓴 모양이다.
물론... 코치선생님 역시 대회내려가서 다른 코치에게 '1학년 중에 잘 쏘는 녀석이 있는데 이번은 몰라도 2~3개 대회 지나면

메달딸 것 같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아들에게 내심 기대를 했고.(문제는... 이 이야기를 우연찮게 아들이 듣게 되었다는거)

그런데 아들은 시합전의 그런 자신감과는 전혀 동떨어진 성적을 받아들었다.
10m 공기권총에선 자신의 평소 성적보다 무려 20점 이상이 안나왔고,
놀라운 적응력을 보인 첫출전 25m 스포츠 권총과 25m 스탠다드 권총 역시 연습기록보다 20점~30점 이상 낮게 나왔다.
탄피가 막혀 0점 처리되어버린 샷마저 있었다.
성적이 나오지 않아 낙담할 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우리도 정말 힘들었다.
아들에겐 전혀 티내지 않았지만 정말이지 안스러운 마음이 들더라.

사격은 확실히 멘탈 싸움이다.
아들은 이번에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낀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 아들이 괜찮은 녀석이란건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무엇이 부족했던 것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다시한번 느낀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김청용의 결선 모습을 일부러 뒤에서 보면서 무엇이 다른지 하나하나 말해주더라.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고 스스로 말한다.

스스로 반성하고 나아지려고 하는 모습.
난 그것만큼 중요한게 없다고 믿는다.
성적은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다지만 이 결과가 아들에겐 약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일주일간의 타지 생활에서 돌아와 피곤했을텐데 우리와 두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하고는 샤워를 하고,
자기 방에서 벽에 표적지를 붙여놓고 아령을 들고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렇게 노력하는 아들에게 나 역시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하겠다...란 생각이 든다.
아들에게 어제 이야기했다. 한꺼번에 만회할 생각하지말고 지금보다 조금씩 나아지는 걸 목표로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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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큰 문제는 아들이 좋아하는 선배 중 한명인 A라는 고3 학생이다.
이 친구는 작년 이 대회 25m 우승자이며 출전한 4개 종목에서 거의 모두 5위 안에 들어간 전국 탑 클라스 선수다.
고등학교 사격 코치 중 이 A라는 학생을 모르는 이가 없으며 이번에도 그 성적이 주목받는 선수였다.
그런데... A 학생은 이번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성적을 냈다.
출전 종목 모두 최하위권.
사실상 완벽하게 포기하다시피한 성적.
이번 대회에서 아들과 같은 방을 썼는데, 아들이 말하길 시합이 끝나면 그냥 숙소에 들어와서 잠을 자벼렸다고 하더라.
두번째인가? 세번째 출전 종목을 망친 후 아들보고 같이 산책하자고 하더니

아들에게 대뜸 '내가 주장인데 못쏴서 너희들까지 엉망이 된 것 같아 미안하다'라는 말을 도대체 몇번인지 해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이 했단다.

마음이 아팠다.
정말 내 아들이 아니지만 A 학생이 느낄 절망감과 답답함, 불안함이 조금이나마 느껴져 정말... 정말 마음이 아프다.
얼마나 힘들까.

인문계 학생들에겐 마지막 여름방학이라도 남아있지만 사격하는 고3에겐 상반기 4~5개의 성적만으로 진로가 결정된다.
고1, 고2때 아무리 잘 쏴도 이 시기에 성적이 안나오면 그동안 쏴왔던 자신의 선수 인생이 한순간에 끝나버린다.
이런 시기에 총을 바꾸면서 찾아와버린 슬럼프.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까...
부디 이 학생의 선전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
극심한 슬럼프에 빠진 A 학생(아들의 선배)이 경기를 마친 후,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김청용 선수가 찾아왔다고 한다.(김청용 선수는 이번에도 10m 공기권총 1위를 했다)
어깨동무를 하더니 엉망이 된 성적을 낸 A 학생을 데리고 나가더란다.
국가대표 상비군 활동등으로 친해진 사이이니 위로를 해주려고 한 것 같다.
그날 A선배가 아들에게 산책을 하면서 김청용 선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주더란다.
노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소위 날라리 김청용 선수가 이토록 놀라운 성적을 낼 수 있는 건 그가 지독한 연습벌레이기 때문이란다.
숙소를 찾아갔는데 없어서 찾으러 나갔더니 주차장 뒷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혼자 아령을 들고 자세연습을 하고 있더란다.
총을 들고 있지 않을 땐 아령을 들고 산단다.
아들은 A선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걸 느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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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나이가 들어 '이 나이에 무슨...'이라며 놔버린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몇가지를 와이프에게 말했다.
아들과 함께 나도 무언가에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래야 노력하는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지.

가만보면... 아들이 날 조금씩 변하게끔 해주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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