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eperation/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directed by Asghar Farhadi


미국과 이란의 대립은 점점 격해집니다. 여차하면 한 판 뜰 기세죠.
미국은 국제사회에서의 절대적 우위를 이용해 우리에게 이란산 원유 수입을 감축하라고 닥달합니다.
뉴스를 들으니 50%까지 줄어들 수 있답니다. 우리나라 수입원유 중 이란산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10~15%에 달한다지요. 
만약 정말 50% 이상 이란산 원유수입이 감소되고 

대립이 장기화될 경우 안그래도 비싼 우리나라 휘발유값은 무연기준 리터당 4,000원까지도 거침없이 오를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가 이어집니다.
답답하지요. 내수경기에 의존하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내수 시장진작이 불가능해질 경우 연쇄적인 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서두가 너무 깁니다만... 이란 영화를 맞닥뜨리는 제 기분은 이런 복잡한 심정이 얽혀 묘...해집니다.
이민 문제로 이혼 얘기가 오가는 씨민과 나데르.
지식인을 필두로 한 이란의 변화의 바람과 전통적인 가치인 명예를 고집하는 현재의 이란. 

이 두가지 이란의 모습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들로 하여금 여지없이, 정말 낱낱히 까발려집니다.
작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여러 관계의 연쇄적인 붕괴는 인간관계의 보편적인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해서 무척 씁쓸한 

여운을 주고, 딸 테르메를 통해 보여주는 암묵적인 편가르기도 이란이 아닌 한국의 사회를 보는 것 같아 무척 속이 답답해지고 가슴도 먹먹해집니다. 
별거. 단순한 부부의 별거라는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가치가 위선과 자기암시로 점철된채 그 위악을 하나둘 까발리는, 그 위악이라는 것도 

그닥 대단한 것도 아닌 문제들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에피소드를 이토록 잘 엮어낸 감독의 능력과 호연한 배우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기교 하나 부리지 않지만 속도감도 꽤 있어서 배우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적 재미도 보통이 아니더군요.
*
카메라도 무척 인상적인데요, 이 영화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프레임 안에 인물을 같이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심지어 마지막 길고 긴 엔딩에서조차 그렇죠.
오히려 인물을 같이 프레임 안에 넣어버리니 더더욱 관계의 단절과 붕괴가 더욱 드러나는 것 같아요.
**
딸 테르메는 감독의 친딸입니다.
***
씨민 역의 Leila Hatami는 너무나 우아하게 아름답더군요...









[L'illusionniste/일루셔니스트] directed by Sylvain Chomet


실뱅 쇼메... 걸작 [벨빌의 세 쌍둥이]를 선보였던 2D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감독입니다.
이번엔... 자크 타티의 말년을 에피소드로 투영한 애니메이션을 공개했는데, 
저도 정말 인상깊게 봤던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의 제작사인 GUY MOVIE가 엔딩 크레딧에 보이더군요. 무척... 반가왔고, 
또 한 편으로는 충분히 오리지널리티를 발휘할 수 있는 회사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창작능력과는 상관없이 
이렇게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에 참여했다는게 기분 좋기도 하구요. 다음엔 GUY MOVIE가 자신들의 오리지널 스토리로 다가올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일루셔니스트]는 화려한 볼거리에 천착하는 수많은 3D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달리 이 영화는 2D의 질감에 유럽의 코믹 카툰을 보는 듯한 펜터치와 채색으로 가득합니다. 
예상컨대 수많은 드로잉이 수반되었을 것이고, CG기법도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만, 영화는 근본적으로 아날로그만이 전해 줄 수 있는 직접적인 따스함을 띄고 있습니다.
덕분에... 군데군데 눈이 휘둥그래지고 가슴히 훤히 뚫릴 만한 카타르시스를 작화를 통해 얻기도 하죠.
실뱅 쇼메는 이렇듯 완성도 높은 작화에 대중의 즐거움을 위해 보낸 자크 타티의 이야기를 살포시 얹습니다. 그것도 진정한 가슴으로 애정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건 단순히 자크 타티에게 대한 헌정만은 아니에요. 시대에서 이름없이 사라져간 광대들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느껴져요.
타티가 영화관에서 스스로를 만나는 장면도 무척 인상적이죠.
마술을 하고, 서커스를 하는 이들은 밀려들어오는 록문화와 다양한 문화에 의해 영화를 뒤로 하고, 이용만 당한 채 역사의 저편으로 쓸쓸히 퇴장하지만 
스코틀랜드의 섬처녀의 새로운 사랑을 열어주는 타티야말로 일루셔니스트 그 자체겠죠.
시대를 살다간 수많은 이름없는 퍼포머들에 대한 실뱅 쇼메의 경외심과 진한 애정이 이 영화에는 가득 담겨있습니다.
못보신 분들이라면 꼭 보시길.
*
음악도... 귓가에서 떨어지질 않아요. 
기본적으로 무성영화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Martha Marcy May Marlene/마사 마시 메이 마를린] directed by Sean Durkin


무겁고 강한 여운이 영화를 본 후에도 지속되는 영화.
공동체에서의 가치관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일상 속으로 들어와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부딪히는 모습을 보면서 나중엔 머리가 복잡해지더군요.
마사이자, 마시 메이이자, 마를린 루시인 주인공 그녀가 형부에게 나중에 터뜨리는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라는 말.
이 대사에 이르르면 머리가 정말로 복잡해집니다. 
영화 속의 마사도, 루시도, 루시의 남편이자 마사의 형부인 맥스도, 영화를 보는 나도 결국 뭘 확신할 수 있고, 뭘 아는지 모르겠는거죠.
영화는 단순하게 어느 한 쪽의 삶을 일방적으로 편을 들어주진 않습니다. 이 두 세상 사이의 브리지는 숲을 가로질러 간신히 공동체를 탈출한 마사의 감정을 통해 보여질 뿐입니다.  
공동의 소유, 무소유의 삶, 평등한 삶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빈집털이나 하며 입에 풀칠하는 이들일 뿐이고, 교외에 커다란 집을 짓고 우아하게 미래를 설계하지만, 

그것도 온전히 자기것은 아닌(대출에 대출) 언니 부부의 모습 역시 마사는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마사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서 어느 쪽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격렬하게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러니 보다보면 혼란스러워지는거에요. 이 세상이고 저 세상이고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은 오히려 마사에 가깝다는게 말이죠.
물론 내가 수영한답시고 사람들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안걸치고 다 벗는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거나... 누군가 격렬하게 섹스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 옆에 가서 눕거나 그렇진 않습니다만...-_-;;;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았건 정해진 세상의 대체적인 규범을 강요받곤 하잖아요.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규범들을 당위적 가치로 인정하곤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러한 당위적 가치에 반기를 들면 홍역을 치루죠. 무시받기 일쑤고.
두가지 세상을 경험하는 마사는 이제 상반된 가치를 지향한 두 개의 세상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이건 성장통 정도가 아니에요.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죠.
덕분에 아무런 해답도 던져주지 않는 결말이 더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이건 스포일러가 아니니 걱정마시길.^^
*
마사 역의 정말... 눈에 띄는 여성은 놀랍게도 올슨 자매의 동생인 '엘리자베스 올슨'입니다.
올슨 자매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 느낌인데, 기럭지도 틀려요. 뭣보다... 이게 장편데뷔라는데 신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연기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완소녀가 나타났어요.-_-;;;









[We Need to Talk About Kevin/어바웃 케빈] directed by Lynne Ramsay


일루셔니스트...를 빼곤 죄다 무거운 영화들이군요.-_-;;;
이 영화는 틸다 스윈턴을 위한 영화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녀가 보여준 열연은 워낙... 많지만 전 그녀의 영화 중 인상적인 영화를 몇 편 꼽아보라면 [the Deep End](2011), [Thumbsucker](2005), 

[Julia](2008), [Io Sono l'Amore/아이 앰 러브](2009)와 이 영화를 꼽겠습니다.
지금 꼽은 영화 중 [Thumbsucker/썸써커]를 제외하면 절대적으로 틸다 스윈턴의 역량에 의존하는 바가 큰 영화들이에요.

[어바웃 케빈]은... 한글 제목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오독의 여지가 다분하다는거죠.
이 영화는 케빈에 관하여...라는 느낌이 아니라 케빈에 대해 우리가 말해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 훨씬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케빈이 중심이 아니라, 케빈에 대한 관찰자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거죠.
영화를 보면 초반엔 대단히 혼란스러워집니다. 워낙 결속력이 강한 모자관계를 중심으로 얘기가 진행되니 자연스럽게 영화적 메시지도 모자 관계에 촛점을 보게 되더군요. 

그러다보니... 사실상 아무 이유없는 케빈의 악마성에 대해 납득이 가질 않는 겁니다. 흐... 이때부터 오독이 시작되는 것 같았어요.
정말 다행히도, 에바(틸다 스윈턴)가 사는 집의 붉은 페인트를 끊임없이 벗겨내는 장면이나, 면회가서 만난 케빈이 입밖으로 물어뜯은 손톱을 하나둘 꺼낸다던지, 

부서진 달걀을 껍질을 골라내지 않고 스크램블을 만들어 먹으면서 껍질을 뱉어내는 에바의 모습등을 보면서 이 영화는 모자관계따위 그닥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구나...하는 걸 느꼈어요. 

물론 제가 철저히 잘못 이해한 것일 수 있습니다. 정답이 어디 있겠어요. 흐...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엘리펀트]는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이 없어요. 

이건 가족과의 관계는 언급할 필요도 없이 아예 부재한다는 구스 반 산트식 역설일 수도 있고, 그따위는 총기살인범과 상관도 없다는 비아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바웃 케빈]에선 케빈의 학교내의 관계가 완전히 거세되어 있습니다. 그의 친구는 조금도 등장하질 않죠. 

[엘리펀트]와는 정 반대의 시선에서 영화가 진행되는데다가, 학살의 과정 역시 철저하게 거세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감독은 그런 결과론에 대해선 시간을 할애할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가 집중하는 것은 성장하기 싫어하고 부조리한 거대한 불온한 심성이 지배하는 위기의 시대정신이고, 

에바는 이러한 위기와 불온한 세상을 위태롭게 버티고 감내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에혀... 쓰고보니 저 역시 혼란스럽긴 합니다만...
*
영화의 시작과 중간에 나오는 12:00 -> 12:01 도 의미심장하다고 봅니다. 
아들의 이름이 '케빈'인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한 의미는 차마 말은 못하겠어요. 말도 안되는 소리같아서.-_-;;;
어차피... 다 자기 방식대로 영화를 보는거니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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