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적 / an Enemy of the Public>
 

- 샤우뷔네 &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Schaubuhne & Thomas Ostermeier)
- LG아트센터 ( 2016.5.28)
 
이 연극을 보게된 이유는 몇년 전 헨릭입센의 또다른 대표작인 <인형의 집> 공연을 정말 인상깊게 봤기 때문이다.(그때는 르브루어 & 마부마인 극단의 공연이었다 - 왜 자꾸 마인부우가...생각이 나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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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릭 입센의 원작에선 주인공 토마스가 끝까지 불의에 맞서는 것으로 묘사된다고 했다.
하지만 연극에선 여지를 준다. 아니, 사실 내가 본 바로는 명백히 다른 결론으로 받아들이도록 결말이 결정된 느낌을 받았다.
온천 주치의인 의사 토마스는 연구 의뢰 끝에 시(市)의 경제적 부흥을 책임지게 된 관광자원인 온천이 사실은 매우 유해한 물질에 의해 오염되어있으며, 그 오염원으로는 장인어른이 소유한 공장에서 흘러나온 폐기물이 유력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토마스는 친구이기도 한 언론사 편집장인 훕스타드, 그의 언론사 사장등과 함께 온천의 유해성을 폭로하기로 하였으나 토마스의 친형이며 시의원인 페테르의 압력에 의해 폭로가 무산되고 오히려 친구와 언론사 사장으로부터 배신까지 당하게 되자 직접 시민들에게 온천의 유해성을 알리기 위한 강연을 강행한다.
이 강연으로 인해 온천의 주가는 당연히 곤두박질치게 되는데 토마스의 장인인 모텐 킬은 이 시점에서 바닥을 친 온천 주식을 토마스와 자신의 딸에게 물려줄 유산을 미리 끌어댕겨 사재기 한 뒤 주식증서를 토마스에게 밀어 넣는다.
그러니까, 토마스가 줄곧 제기해온 온천의 유해성에 대한 입장을 번복하면 다시 주가가 오를 것이고 토마스는 엄청난 시세차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토마스는 온천의 오염원으로 지목된 장인어른의 공장에 대해 더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란 수를 쓴거지.

난 이 연극을 보면서 굳이 마지막 장면에 만신창이가 된 토마스가 부인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주식증서를 들어 올리고 유혹에 넘어간 듯한 눈맞춤을 하는 것으로 끝을 내야했나... 적잖이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샤우 뷔네 극단의 출연진은 이 부분에 대해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들의 감정도 변화할 수 있으므로 어떤 때는 토마스가 끝까지 저항할 수도, 어떤 경우엔 자본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더불어 헨릭 입센의 원작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주인공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난 원작을 읽어보지 못하여 어떤 흐름에 의해 불의에 맞서는 것이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민중의 적> 연극을 보면서 연극이 온전히 주지했던 메시지, 그러니까 민주주의적 다수가 결코 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주제의식과 함께 자본이 인간의 최우선 가치가 되어 자본의 탐욕에 의해 희생될 수 있는 다른 가치에 대해 최소한의 배려조차 없는 이 연극 속의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현 실정과 끔찍할 정도로 오버랩되는 탓에 남들 다 웃는 씬에서도 차마 웃을 수가 없었을 뿐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그리고 군데군데 이 연극이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녹아들어있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진심 끔찍한 설정에서까지 단지 배우들의 리액션이 우스꽝스럽다는 이유로 웃음을 연발하는 객석 분위기가 난 솔직히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 연극 속에서 주인공 토마스와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는 이는 그의 친형이자 시의원인 페테르다.
그가 시의원이 된 후 수많은 이권들을 정리하며 시의 관광수익원으로 구체화된 것이 바로 '온천'이기 때문에 그는 동생인 토마스에게 온천이 오염되었다는 주장을 번복하도록 압박한다.
이러한 정치적 횡포에 맞서 함께 대응키로 한 절친이자 언론사 편집장인 훕스타드, 그리고 방관적 자세를 보였으나 표면적으로는 토마스를 지지했던 언론사 사장은 시의 주수익원이자 자금줄인 온천의 오염상태를 토마스의 주장대로 개선하려면 당장 시민 1인당 수백만 유로를 들여야할 것이며 증세가 불가피할 것이며, 이를 감당할 수 있겠냐며 겁박하는 페테르에게 결국 굴복한다.
이들은 토마스와 함께 승리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계산한 뒤 자본의 편에 서기를 선택한 것이지.(더군다나 언론사 사장은 부동산 협회의 임원이기도 했다)
이후는 한국사회가 내부고발자를 다룬 것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언제나 변절자가 더 가혹하게 자신이 지지했던 가치를 공격하는 것처럼(하태*같은 인간을 보시라) 훕스타드와 언론사 사장등은 온천의 유해성을 시민들에게 알리려는 토마스를 가장 앞장서서 공격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모습은 더도덜도말고 딱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이 희석화되고 졸지에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현상과 완벽하게 오버랩된다.

사실 온천이 오염된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토마스의 장인이자 토마스 와이프의 의붓아버지인 모텐 킬이 소유한 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때문이었다.
하지만 연극을 보면서 알 수 있듯, 모텐 킬은 단 한번도 논쟁의 중심에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토마스와 언론사, 시의원이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던 3막(?)에서도 그는 얼굴 한번 내밀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 소동이 휩쓸려가고 남은 황폐화된 주인공에게 찾아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굴복시키려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페테르나 훕스타드나 언론사 사장이나... 다들 모텐 킬의 장기판의 졸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

연극을 보지 못했어도 이 정도만 들으면 <민중의 적>이란 연극이 작금의 비참한 한국과 얼마나 오버랩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무려 5년 이상 제대로 논란조차 되지 못했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완벽하게 오버랩되다시피한다.
아니, 오히려 연극보다 더 한심하고 참혹한 지경이지.
최소한 <민중이 적>에선 토마스라는 양심있는 의학자가 고군분투하며 저항이라도 하지만 이 나라의 가습기 살균제 살인사건'에선 그러한 학계의 양심조차 찾아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번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통해 다시한번 천한 자본주의의 민낯을 우린 들여다볼 수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연극 속 온천의 유해성으로 인해, 혹은 가습기 살균제에 의해 피해자가 뻔히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 가능함에도 이러한 위험요인이 사적인 욕망과 이익에 의해 은폐되고 강행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봐야할 것일까.
토마스는 'I Am What I Am'이라는 나이키의 광고 문구를 인용하여 지독하게 개인화된 사회 현상을 혹독하게 성토한다.
이러한 개인화는 사회와 사회, 개인과 개인이라는 연결고리를 황폐화시키며 오직 사적 이익과 욕망으로 점철된 공멸의 세상으로 내몬다고 강변한다.
이렇게 개인과 개인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진 다수(majority)의 세상은 결국 집단지성의 힘을 희석화시키며 이 와중에 소수의 의견이 묵살당하며 희생당하는 일이 당연시된다. 지금 딱...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 모습말이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적어도 난 이렇게 이해했다.
특히 토마스가 바보상자(TV)와 가난이 사회를 분리시키고 있으며 '검약과 절제만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다'라는 대목에선 더더욱 그런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 자신을 비롯한 우리 대부분은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소비해야하며, 그러한 소비로 인해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끔찍하리만치 당연하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소비와 욕망의 끝없는 씨지프스의 바위는 우리를 존재의 본질로부터 괴리시키고 나아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자본주의를 맹신하게 되며, 자본주의의 수많은 병폐가 드러날 때마다 각양각색의 형태로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진화시키며 개인의 삶을 좀먹는다는거지.
물론 이런 말을 하면서, 토마스가 연극 속에서 강변한 그 말에 심정적으로 상당히 동의하면서도 난 지금도 뭔가 또다른 소비를 갈구한다. 더 좋은 카메라,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옷.
이를 어찌해야할까...
그리고 무얼 먼저 실천해야할까.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은 이 나라에서 이 고민은 정말 쉽지 않다.
늘 제자리를 빙빙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연극 도중 3막(?)인가에 이르면 토마스가 언론사등으로부터 배신당하고 홀로 온천의 유해성을 알리는 강연을 개최한다.
이때 객석의 불이 환하게 켜지고, 토마스를 헐뜯는 언론사, 시의원등도 객석으로 내려가 난데없이 관객들이 이 논쟁에 참여한 시민이 되어버린다.
이게 상당히 인상깊었는데 언론사 사장이 토마스의 의견에 동의하냐고 관객들에게 묻자 다수의 사람들(나를 포함)이 손을 들었다.
단지 여기서 끝난게 아니라 그럼 왜 토마스의 말도 안되는 저 의견에 동의하는지 이유를 말해볼 사람이 있냐고 관객에게 묻는다.
오바마 기자회견 때 오바마가 한국 기자들에게 질의권을 줬음에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던 우스운 광경을 본 터라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게 아닐까하는 걱정이 살짝 들었지만 의외로 많은 분들이 손을 들어 의견을 얘기했다.
특히, 첫번째로 얘기했던 관객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연역적 구술 방식으로 언론사 사장을 옭아맸다.
다만... 독일어 통역을 거쳐야 하는 탓에 이 토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는거.
내가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면 이 연극을 보다 더 깊이있게 즐기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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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도중 출연진이 음악을 직접 연주하기도 하고 트랙이 깔리기도 하는데 모두 상당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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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의 온천 유해성 폭로 기고문을 신문에 올리기 직전의 신문사 사무실에선 의자가 두개 뿐이며,
시의원이 찾아오거나 토마스의 부인이 찾아올 때마다 다른 직원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이건 단순히 코미디적인 요소가 아니라 이른바 '자리뺏기'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더라.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했듯 토마스는 이후 벌어지는 폭로 강연에서 '검약과 절제만이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제로섬 게임으로 누군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어있다.
사무실에 누군가 찾아올 때마다 편집장은 자신의 보장된 우월적 지위를 통해 결코 자리를 뺄 일이 없다.
하지만 시청에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말단 직원은 그때마다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단순히 그냥 웃기기 위한 장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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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케하다보니 우연찮게 함께 사진을 찍게 된 배우들.

 

 

 

 

언론사 편집장 훕스타드 역.

 

 

 

 

 

 

 

주연배우 토마스 쉬토크만 역.

 

 

 

 

 

 

그리고 trailer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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