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ed by Diego Quemada-Diez (디에고 꿰마다 디에즈)
2013 / 108min / Mexico

Brandon Lopez (브랜든 로페즈), Rodolfo Dominguez (호돌포 도밍게즈) , Karen Martinez (카렌 마르티네즈)


<Sin Nombre/신 놈브레>(2009), <Miss Bala/미스 발라>(2011), <Maria Full of Grace/기품있는 마리아>(2004), <City of God/씨티 오브 갓>(2002),

<Tropa di Elite/엘리트 스쿼드>(2007, 2010년의 2편도 필견의 가치가 있다)는 물론 <Julia/줄리아>(2008)등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남미 빈민의 모습은,

역사를 거꾸로 억지로 돌리려는 시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2015년의 비정상적인 한국의 시각에서 봐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절한 모습 그 자체다.
남미 빈민촌의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총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며 갱단에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도 언제든 갱단의 표적이 되어

마약이나 무기를 밀수출/밀수입하는 조직원으로 강제되곤 한다. 이러한 절망적인 삶을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미국 국경을 건너려고 하지만

상당수가 실패하거나 그 와중에 사망하게 되는, 도대체 문명 사회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잔혹한 일상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을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우린 간접적으로나마 사회적 안전망이 완전히 해체되어버린 나라의 대중들이 어떤 고통을 겪게 되는지 볼 수 있는데

이들 남미의 대중들을 쉴새없이 사지로 내모는 그 모든 추악함의 이면에는 극심한 부의 집중과 그로인한 빈곤의 만연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린 기억하고 있다. 1980년대의 멕시코는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이 가득한 곳이었으며, 멕시코의 대학들 역시 상당한 인문학적 수준을 자랑했다는 것을.
또한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미국에 의해 무너지고 수많은 친미 정권이 남미에 들어선 이후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부패와 폭정이 만연했는지

이미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다.(다시한번 얘기하지만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보시라)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이 저질러온 역사는 살육과 정복의 역사 그 자체라고 봐도 사실 무방하며 이러한 사실은 이제 대부분의 경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지금의 저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미국은 1700년대 말까지만해도 현재의 1/3 수준에 불과한 동부지역만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지도를 세로로 3등분한다면 영국과 가까웠던 동부지역만 미국의 영토였고 중부(루이지애너)는 프랑스령이었으며

서부는 우리가 잘 알듯 아메리컨 인디안들의 땅과 멕시코의 땅이었다.

(텍사스등등은 모두 멕시코령이었다. 그리고 멕시코인들은 피부색등이 유사한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
1800년대 초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복잡한 국내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배하고 있던 미국 중부를 1,500만불에 미국에 팔아치워버리는 탓에

미국은 중부지역을 돈으로 수중에 넣게 되고,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부개척이(서부학살)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 땅이었던 텍사스등등을 호시탐탐노리던 미국은 고의로 국경에서 분쟁을 유도한 뒤 이를 빌미로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는데

이게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멕시코-미국 전쟁이다.
지금의 세계지도를 보면 결과를 알 수 있듯 이 전쟁은 일방적이었다.
멕시코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미국의 무기와 조직화된 군대를 이길 수 없었고 멕시코시티까지 함락되었으며 항쟁을 하면 할수록 영토를 빼앗기게되자

결국 평화협정을 제안, 국토의 40%를 미국에게 갖다 바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미국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동부와 서부의 양대양을 끼고 급속도로 팽창하여 세계 열강이 되어버린다.

남미의 지금 참상은 이렇듯 세계 열강이 되어버린 미국이 공산주의의 남미 확산을 막는다는 핑계로 사주하여 옹립된 군정의 부패와 폭정으로 인하여

야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 NAFTA로 인한 민중 자본의 몰락은 생각보다 매우 빠르게 빈곤의 토대를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NAFTA가 멕시코 페소화 폭락으로 인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미주 대표들이 남미의 빈민들을 어떻게 재건할지를 논의하는 포럼이 열리면 같은 시기, 같은 도시에서 반미 단체들의 포럼 역시 함께 열린다.

그만큼 미국은 남미 대중의 빈민화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이렇게 남미의 자원과 인력을 지들 입맛대로 부릴 수 있게 된 미국은 자신들이 뿌린 빈민양산의 댓가를 지금 톡톡히 치루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수많은 남미 빈민의 미국 불법입국이다.
미국 밀입국은 단순히 어메리칸 드림을 안고 고향을 떠나온 남미 빈민들의 문제라고만 보기엔 대단히 복잡한 여러 문제들이 뒤섞여 있다.

<Maria Full of Grace/기품있는 마리아>에서 볼 수 있듯 마약을 밀반입하는데 빈민들을 이용하는 갱단의 탐욕으로 인한 문제는 물론이고

밀입국자들에 대한 인권의 문제등이 뒤섞여 지금도 미국에겐 아주 골치아픈 문제가 되어버렸다.

현재 미국 인구 3억 2천 중 5천만명 이상을 히스패닉이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일부에선 히스패닉이 1억 인구를 달성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며

이럴 경우 히스패닉의 미국 내 정치적 영향력은 백인 사회를 위협할 것으로 보고 있다.(이미 흑인 인구수를 추월했다)
아무튼 미국은 자국으로 유입되는 밀입국자들을 차단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고 이민자들을 혐오하는 미국 남부의 자경단체들까지 무장을 하고

국경 수색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원천적인 차단은 여러가지 이유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게 사실이다.
밀입국이라는 것 자체가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 밀입국을 원하는 이들에겐 엄청난 돈을 브로커에게 넘겨야하고 단순히 돈만 넘기는 것뿐 아니라

갱단과 연계된 브로커들이 강제적으로 떠넘기는 마약이나 무기도 밀반입해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보고 되고 있기 때문에

밀입국의 방식이 점차 지능화되고 대담해져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아무리 밀입국이 지능화되고 대담해졌다고해도 수많은 밀입국자들이 도중에 갱단에 의해 살해 또는 납치에 의한 강제 노동을 당하거나

국경 부근에서 배고픔, 일사등으로 인하여 사망하고 있고 여기에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는 밀입국자를 국경 수비대 또는

자경단이 경고없이 조준사격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어 사회문제화되기도 한다. 

2014년에는 15세 멕시코 소년을 멀리서 조준사격하는 동영상이 유출되어 미국과 멕시코 국민들(정부빼고)의 갈등이 매우 고조된 적도 있다.

영화 이야기 하나 하면서 이렇게 주절주절 엄청 긴 잡소리를 늘어놓은 것은,
이 영화가 과테말라에서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는 10대 아이들에 대한 잔혹한 로드 무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가슴 미어지는 모습들은 <Sin Nombre/신 놈브레>의 처절함을 넘어서는 느낌인데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나서도 와이프와 나는 상당한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개인적인 이유를 보여주지 않은 채 이 영화의 주인공이며 연인 사이인 후안과 사라는 친구 사무엘과 함께 미국의 로스앤젤리스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영화는 굳이 이들이 집을 떠나는 개인적인 이유를 보여주지 않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동네의 열악한 모습, 친구 사무엘을 만나러 간 쓰레기 매립장등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미국으로 향하는 이유를 대략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미국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말할 필요없이 하나같다는 의미인 것 같다.
이들은 열차를 올라타고 또 올라타서 멕시코로 향하던 중에 스페인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인디언인 차욱을 만나게 되고

사라의 따뜻한 배려 속에 이들 넷은 함께 이동하게 된다.
돈도 거의 없고 세상의 폭력과 부조리 앞에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 과연 무사히 그들이 그리던 땅인 미국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서로 단단히 의지해가는 이들의 모습을 관조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그 어떤 자비와 희망의 여지도 배풀지 않는다.
누군가는 중도에 포기하고, 누군가는 더이상 함께 할 수 없어진다.
그 과정들이 이 아이들에게 너무나 잔혹할 뿐이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편에선 도대체 어떻게 문명화되었다고 으시대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되는 부조리를 바로잡지 못하는 것일까,
아프리카, 아랍, 동남아시아, 남미... 도대체 왜 이 나라들에서는 이토록 빈민의 삶이 처참함을 넘어 절망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을까.
이런 뻔한 분노만이 느껴지다가 문득... 이처럼 가열차게 부의 집중이 가속화되고 사회적 안전망이 해체되어가며

(최저임금의 답보 상태, 기계적 복지비용의 투입 외엔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빈민의 대상이 축소화되는 현상, 심지어 고용보험대상마저

수령 금액의 비중을 50->60%로 올리겠다면서 수령 대상은 축소하는 눈속임의 복지등) 사회적 다원성이 몰염치한 자본 가치로 수렴되는 우리 나라 역시

이러한 파렴치한 정권이 계속 이어지고 민중의 저항이 무기력하다면 위에 언급한 나라들의 모습과 다를 수 있을까...?하는 섬뜩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자본이 넘쳐나는 시대.
하지만 그 자본이 초상위 계층에 갈수록 집중되어 부의 분배가 이뤄지지 않는 시대.
2차 대전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회복불가한 상처를 입은지 고작 7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인간은 역사를 통해 전혀... 배우지 못했다.
우린 아직까지 수많은 소비 생활에 익숙해져 우리의 삶이 마치 소비를 통해 편의와 문명을 획득하는 양 착각하고 살지만,
실상 우리들 서민을 비롯한 세상의 대다수는 완벽하게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결코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 과연 그들의 처절한 빈곤의 삶은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일까?
이토록 수많은 세상의 빈민들의 절망이 결코 우리와 먼 이야기일까?
빈곤으로 인한 분노와 절망이 시스템을 위협하게 되고, 분노와 절망을 그릇된 가치의 종교로 포장하여 대립하게 되면

결국 세상에서 편안한 곳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굳이 먼 나라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반역사적 정책과 대중을 호도하는 우리나라의 미디어를 보면

우리도 그러한 빈곤과 절망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걱정을 난 지울 수가 없다.

차욱이 손가락으로 보여준 '따이브 (눈/snow)'
후안이 마주한 따이브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
너무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길게 쓴 탓에 이 영화가 얼마나 건조하면서도 섬세한 시각으로 보여지는 지를 얘기하지 못했다.
그냥 보시라.
영화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만듦새를 지닌 영화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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